2004년 3월 12일 오전 11시56분.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 181명(재적의원 271명)의 찬성이 필요했는데, 이를 훨씬 넘겼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정말 사람을 잡았다. 대통령 탄핵소추는 헌정 사상 처음이었다.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탄핵소추를 받아들이면 노무현은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날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처리되던 날 국회 본회의장의 모습. 의장석을 점거하고 있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국회 경호원과 야당 의원들에게 끌려 내려오고 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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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박관용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한 가운데 “가결”을 선포했다. 한쪽에선 박수와 환호가, 다른 쪽에선 분노와 고성이 쏟아졌다. 구두짝과 명패ㆍ서류뭉치 등이 의장석으로 날아들었다. 본회의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미 1박2일간의 치열한 몸싸움 대치로 지친 상황에 여당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실신해서 바닥에 쓰러지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주저앉아 통곡하기도 했다. 가관이었다. “대한민국은 어떤 경우라도 전진해야 합니다!” 의장의 마지막 말은 전혀 울림이 없었다.
도대체 어찌해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인가. 참여정부 자체가 정치적 기반이 허약했던 터라서 노무현의 리더십이 불안불안하긴 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큰 과오를 저질렀더라도 선거로 뽑힌 대통령을 쫓아내는 결정에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 탄핵 이야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으레 있어 온 정치 흥정쯤으로 치부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표결을 강행하려는 박관용 의장과 야당 의원들에게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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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약한 정치 기반, ‘설화’가 탄핵 불러
탄핵 사유의 핵심은 노무현의 말이었다. 대통령이 선거 중립을 지켜야 함에도 특정 정당을 편드는 발언을 했다는 게 주된 ‘죄목’이었다.
“국민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 하고 싶다.”
민주당은 선관위에 고발했고, 선관위는 이에 대해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 위반”임을 통보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선관위의 이중적 태도였다. 민주당에 통보한 것과 청와대에 알려준 내용이 달랐다. 청와대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법 위반 여부를 생략한 채, “앞으로 중립 의무를 지켜 달라”는 권고 수준의 두루뭉수리한 공문을 보냈던 것이다. 〈박스 참조〉
문제는 당시의 정치 기류가 전에 없이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민주당의 내부 분열이 빚어낸 후폭풍이 불씨였다. 노무현 지지 그룹을 중심으로 열린우리당이 만들어졌고, 노무현이 열린우리당에 대한 공개 지지까지 이어가자 민주당을 화나게 한 것이다. 민주당은 졸지에 한나라당 뺨치는 야당 세력으로 표변했다. 정치 지형은 소수 여당, 거대 야당 국면이 돼버렸다.
17대 총선을 코앞에 두고 민주당 조순형 대표와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노무현 탄핵’이라는 이슈에 의기투합했다. 조순형은 “노 대통령의 납득할 만한 사과가 없으면 소추안을 발의하겠다”며 조건부 탄핵을 꺼내들었다. 최병렬은 “탄핵 추진이 당내 여망”이라며 강공을 주문했다. 그리고 3월 9일, 두 당은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조순형 민주당 대표(왼쪽)와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4당 대표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처리된 다음날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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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민주당이 ‘사과’를 조건부로 내건 만큼 탄핵을 막을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이 기자회견(3월 11일)을 통해 간단히 일축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 (나의) 잘못이 뭔지 잘 모르겠는데, 시끄러우니까 그냥 사과하고 넘어가자거나 그래서 탄핵을 모면하자는 뜻이라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탄핵은 헌정이 부분적으로 중단되는 사태입니다. 이와 같은 중대한 국사를 놓고 정치적 체면 봐주기나 흥정하고 거래하는 선례를 남기는 것은 한국 정치 발전을 위해서 절대 이롭지 않습니다. "
노무현다웠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말 트집잡지 말고 법대로 해보자는 것이다. 위법사항을 생략한 채 보낸 선관위의 공문 내용도 경고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상황에서 노무현의 입이 뜻밖의 사고를 쳤다. 이날 회견에서 자신의 형에게 뇌물을 건넨 기업인을 실명을 거론하며 비난했고, 그 기업인이 그 말을 듣고 한강에 투신자살한 것이다.
" 대우건설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없었으면 합니다. "
뇌물 받은 자기 형은 순진한 시골 사람이라 죄가 없고, 뇌물을 준 대기업 사장이 잘못한 것이라는 말 아닌가. 그것도 좋은 학교 운운하면서 비아냥조의 인격 모욕까지 보탰으니….
이 사건은 중도적 입장의 사람들을 실망하게 했고, 애매한 입장이었던 상당수 야당 의원들의 표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박관용도 국회의장으로서 파국을 피하기 위해 막판까지 안간힘을 썼으나 이 사건이 결정적이었다고 떠올린다. “대통령의 ‘수준’과 ‘자격’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하고 있던 야당 의원들의 결단을 굳히게 했다.”(박관용,『다시 탄핵이 와도 나는 의사봉을 잡겠다』)
2004년 3월 12일 경남 진해의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 행사장을 떠나기 전 주먹을 불끈 쥐고 인사하고 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후에도 이날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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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인 노무현은 창원의 로템 공장에서 탄핵안이 처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까지 예정된 일정을 그대로 소화했다. 기가 막혔으나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헬기를 타고 청와대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국회로부터의 통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100여 명의 직원이 도열해 처연한 심정의 대통령을 맞았다.
“괜찮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더 걱정입니다.”
그 말을 곧이듣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저녁 수석보좌관들과의 만찬에서야 신세타령 삼아 자신의 속내를 털어놨다.
" 정말, 무슨 운명이 이렇게 험하죠? 몇 걸음 가다가는 엎어지고…. 또 일어서서 몇 걸음 가는가 싶으면 다시 엎어지고. " (윤태영 대변인 중앙일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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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로 울화 달래… 이순신에 심취
노무현은 두 달간의 직무정지 기간 청와대에 칩거했다. 총선 투표를 포함해 세 번의 외출이 전부였다. 변호사로 입신한 이후 하루하루 바쁘게만 살아왔는데, 대통령이 돼서 탄핵소추를 당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주어진 강제 휴가였다. 처음에는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쏟아졌다고 했다. 누적된 피로와 긴장 탓이었으리라. 청와대 관내를 여유롭게 산책도 하고 때로는 북악산 등산도 했다.
역시 유폐 생활에는 독서가 제격이었다. 드골을 비롯해 나폴레옹, 로베스피에르, 이순신 등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특히 『칼의 노래』『경제전쟁 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등 이순신에 관한 책을 섭렵했다고 한다. 통영 등 전적지도 찾으려 했는데 총선에 영향을 미칠까 봐 주변에서 말렸다고 한다. 물론 이순신은 민족의 영웅이다. 그러나 노무현이 칩거 속에 이순신에 빠졌던 데는 각별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모함에 빠져 백의종군해야 했던 이순신의 모습에서 자신의 억울함이 겹쳐 보였을 수도 있다.
성찰과 재충전을 위해 신이 내린 소중한 시간이라고 아무리 자위해 봐도, 노무현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을 것이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칭송은커녕 탄핵소추를 당해 헌재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얄궂은 신세가 되다니….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 '탄핵 무효' 구호를 외치며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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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전임 정부에서 물려받은 카드 대란, 같은 편이라 생각했던 화물연대의 파업, 지지자들의 반발을 불렀던 이라크 파병 등등…. 국익을 위해 밀어붙였던 것들이 싸잡아 탄핵 사유에 ’경제 파탄’ ‘민생 도탄’으로 적시되다니 말이 되는가. 직무 정지 중(4월 11일) 기자들과의 등산길에선 탄핵 사유 중 ‘경제 파탄’을 거론하며 “내가 천재도 아닌데 1년 만에 성과를 내라는 건 석 달 만에 아이를 낳으라는 격이 아니냐”며 격한 감정을 쏟아내기도 했다.
대통령의 직무정지 중에 17대 총선이 치러졌다(2004.4.15). 그런데 탄핵소추를 끌어낸 야당의 환호도 잠시, 역풍이 불어닥쳤다. 대역전.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확보하며 과반을 차지한 것이다. 탄핵소추 성공으로 기고만장했던 야당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추락했다.
‘탄핵 반대’를 외치며 광화문에 붙은 촛불 민심은 열린우리당 지지로 이어져 ‘탄돌이(탄핵+돌이)’들을 국회로 보냈다. 노무현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 헌재 판결 이전에 선거를 통해 국민의 정치적 판단은 이미 “탄핵 NO“를 알렸던 셈이다.
한 달 뒤 헌법재판소는 탄핵 기각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소극적·수동적으로 이뤄진 가벼운 위반 행위로 대통령을 파면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선거법을 어긴 사실은 인정되지만, 그것이 탄핵으로 단죄할 죄는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법을 어긴 것은 사실이지만 경범죄라는 것이다.
2004년 5월 15일자 중앙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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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후 달라져… 자기 확신 강해지고 유연함 줄어
63일 만에 노무현이 대통령 자리에 돌아왔다. 노무현의 첫 담화는 경제 이야기에 집중했다. “경제는 원칙에서 출발해야 하며, 어려울 때일수록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식 행사 참석 대신 경제 일정 위주로 스케줄을 잡았다.
탄핵 사태 이전과 이후의 노무현은 달라졌다.
(계속)
경제부총리 이헌재가 달라진 그의 모습을 회상했습니다.
만약 탄핵 사태가 없었다면 노무현의 리더십은 어떠했을까요.
집권 후반기 노무현 리더십이 심각한 경화 현상에 빠져든 이유,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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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노무현, 실패한 노무현〉 더 많은 기사를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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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이는 정치할 수 없나”…술 먹던 노무현,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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