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
여전히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비상계엄 선언으로 야기된 정치적 위기를 대통령 탄핵으로 넘기면서 한국 민주주의가 복원되었지만 그다지 기쁘지도, 개운하지도 않다. 애당초 일어나서도 안 되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 생겨났다. 무모하고 독단적이며 정치적으로 무지한 한 사람이 우리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렸다. 경제적 성취와 함께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를 이뤄내고 지켜왔다는 우리의 자긍심에도 큰 상처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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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오판이 부른 정치적 위기
권력 분산 없이는 언제든 재현 가능
대통령이 갈등·분열의 정점에 위치
퇴행적인 정치 시스템 근본 혁신을
우리 민주주의가 이번의 심각한 도전을 버텨내기는 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 통치 시스템의 허술하고 취약한 모습이 드러났다.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체제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허물어지기 쉬운지를 이번 사태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민주화 이후 권위를 갖추면서도 정치적으로 타협과 자제의 정치력을 보여준 과거의 리더들에 대한 기억 속에서 오늘날 우리 시스템의 허술함을 잊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훈련되지 않고 준비되지 않은, 그리고 인성마저 부족한 사람이 나라를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인물인지 알지도 못하고 검증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상대편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에 눈이 어두워, 마치 복권 뽑듯이 리더를 고르는 일이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현행 시스템하에서는 언제든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앞으로도 이런 그릇된 선택이 반복해서 행해진다면 그때 우리 사회가 얼마나 더 심각한 피해를 겪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편, 검찰 등 공안기관의 활용이나 인사권 행사에서는 제왕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정책 측면에서는 무기력하고 무능한 대통령들이었다. 이번뿐만 아니라 최소한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나라의 정치 리더십은 끊임없이 추락해 왔다. 우크라이나, 중동에서의 전쟁, 트럼프의 복귀 등 국제정세는 불안정해지고, 과학 기술 산업 역시 AI 시대의 도래와 함께 재편되는 등 주변 환경은 급변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새로운 변화를 주도해 나가야 할 견고하고 신뢰할 만한 리더십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구절벽이나 지방소멸과 같이 우리 사회의 기반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안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런 구조적 문제를 풀어낼 효과적이고 안정적 리더십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급한 변화와 개혁을 이뤄내지 못한 채, 그 세월 동안 우리 사회는 정체되어 있었다. 미래로 달려가기는커녕 우리 사회는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을 두고, 또 한 사람에게 집중된 권력을 온통 차지하기 위해 두 쪽으로 갈려 격렬하게 대립하고 싸웠다. 그 다툼과 분열의 정점에 놓인 대통령은 그저 한 쪽의 리더였을 뿐이다.
이번의 계엄 발동은 지극히 시대착오적이고 황당한 결정이었지만, 사실 갑작스러운 일이라기보다는 지난 10여 년간 이어져 온 한국 정치의 무능과 분열이 극적인 방식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이번 사태 이전부터 대한민국이라는 배의 밑바닥에 작은 구멍이 생겨났고 선체 아래부터 조금씩 물이 차올라오고 있었던 셈이다. 이번 사태는 무능과 분열의 정치를 이대로 둔다면 우리 사회가 지불해야 할 정치의 비용이 어느 정도까지 크고 심각해질 수 있는지 깨닫게 했다. 제도적인 개혁을 통해 수리하지 못하면 배는 점점 더 가라앉게 될 것이다. 대립과 분열의 정치가 지속된다면 우리가 그간 어렵사리 이뤄놓은 안정과 번영도 그저 하루아침에 모두 불안정해질 수 있는 것이다.
국회의 탄핵 결정으로 사태가 일단 진정되었음에도 여전히 마음이 무거운 것은, 그것이 우리가 직면한 정치적 위기를 진정으로 해소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 탄핵에도 불구하고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온 정파적 양극화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이 때문에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인용되고 조기 대선을 통해 또 다른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이번 사태가 마무리된다고 해도, 그것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정치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주지 못한다. 인물만 바뀐 채 지난 10여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극단적 분열과 소모적 갈등이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는 또다시 정치의 덫에 걸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수 있다.
결국 이번에 경험한 대로, 한 사람의 독단적 결정이 사회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안정과 번영을 기약할 수 없다. 한 사람에게 집중된 권력을 나누고 중앙에 집중된 권한도 지방과 나누면서, 제도적 견제와 협력이 불가피한 방식으로 체제를 바꿔야 한다. 매우 불행한 일이었지만 이번 사태는 우리의 건강하지 않은 정치 현실을 직시해야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냉정한 반성을 통해 절박한 심정으로 이제는 사회적 짐이 되어 버린 우리의 정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려는 모두의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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