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과수원 주인들은 제 자식들에게 사과를 먹이지 않는다"는 낭설이 나돌았다.
해충이 들끓어 농약을 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사과를 수확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정제되지 않아 인체에 치명적으로 해로운 농약을 사용했기에, 사과를 껍질째 먹다가 나타날 부작용을 경계한 까닭이다.
가난한 집 철부지 생각에도, 제 자식에게 먹이지 못할 사과를 남에게 판다면 과수원 경작으로 부자로 사는 일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경멸감이 들기도 했다. 당시 면서기만 되더라도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광경을 보더라도 부모 명색이 자식에게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기보다, 속임수를 써서 공갈 사다리에 올려 부와 권력을 누리게 하려는 후안무치 인생들이 들끓었다.
사과에 대한 전설과 일화 중에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다짐과 식민지 폭군에게 끝까지 저항한 '빌헤름 텔(Wilhelm Tell)' 전설(?)은 청소년들에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건강한 가치관 형성에 이바지했을지 모른다.
사실. 지구 최후의 순간에도 인류를 위하여 가치 있는 일을 하겠다는 각오는 무언가 확실한 신념이 없으면 생각하기 어려운 명제였다. 아무리 자유와 독립을 갈망한 일념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거는 거라면 몰라도 아들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화살로 쏴 맞추겠다는 불굴의 의지와 경이로운 담력을 어떻게 설명할까?
"아들아! 움직이지 말라!"고 외치며 화살을 쏘아 아들 머리 위에 얹힌 사과를 맞힌 텔에게는 숨겨 놓은 화살이 한 개 더 있었다. 폭군 게슬러가 그 화살을 어디에 쓰려느냐고 묻자, 텔은 "실수로 내 아들이 다치면 나머지 화살로 게슬러 당신의 심장을 쏘려 했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이처럼 운명과 대결하는 의지를 그려낸 실러(F. von Schiller)는 "진정한 용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으니, 평소 정의로운 행동 뒤에 벌어질지 모를 돌발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한다. 특히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자유와 용기를 가지려면 마음 자세만이 아니라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로시니(G, Rossini) 작곡 '빌헤름 텔 서곡'은 새벽, 폭풍, 고요, (군대)행진의 4부로 구성되었는데 4악장이 힘찬 기상을 나타내며 경쾌하게 울린다. 아침에 들으면 의욕이 솟아나는 느낌이 든다. 텔처럼 대의를 위해서 전부를 다 바치지는 못할망정 사욕을 위해 대의를 저버리면 아니 된다고 다짐도 하게 된다. 평소 마음의 준비를 굳게 해야시련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일까? 시련과 고통을 참아내야 희망을 찾아갈 수 있다는 뜻인지, 마지막 행진을 위한 전주가 치밀하다는 느낌이 든다. 비상 게엄 사태 뒤에 빌헤름 텔 서곡을 들으면서 병장 아래 상병만도 못한 인물들이 그 무거운 별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어느 유명 인사가 '자녀 입시 비리'와 '감찰 무마' 혐의로 2024년 12월 12일 대법원 최종 판결을 받기전 "2019년 이후 나는 항상 칼날 위에서 살았고 칼날 위에서 행동했다"고 했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고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다짐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어떤 사과나무를 심을까?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눈물의 사과나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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