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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목)

[시론] 위기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살아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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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남국 전 한국정치학회장·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역사는 사람들을 유혹해서 사람들이 역사의 흐름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게 하고 갑자기 가면을 벗어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역사가 예정된 필연의 길을 간다고 믿고 싶지만 역사는 우연과 필연, 열정과 이성이 서로 부딪히고 분열하는 가운데 변화한다.

따라서 역사 속의 행위자들은 자신이 의도하고 예측했던 주관적 판단과 객관적 결과들 사이에서 일그러진다. 특히 정치 지도자는 예측할 수 있어야 하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정치 세계의 현실 속에서 행동에 착수해야 한다. 그리고 실패했을 때 가혹한 역사적 책임을 요구받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러한 정치의 비극적 속성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반대파 부정하는 반정치적 태도

정치 종언, 정치 공동체 파멸 초래

탄핵, 헌정제도 재구성 기회 되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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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보는 윤 대통령의 입장은 여러모로 미국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입장과 닮았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을 앞두고 임기 도중에 사임한 최초의 미 대통령이었던 닉슨은 정치의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했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승리를 추구했다.

그는 1972년 재선에 도전해 일반 득표율 60.7%에다 49개 주 선거인단 선거에서 승리할 정도로 압도적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불법이 드러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승리는 빛이 바랬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정치적 반대 세력을 왜곡된 역사의식과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 세력으로 자주 몰아붙였다. 이런 인식은 서로 다른 의견이 공존하는 정치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反)정치적 태도다. 나와 함께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반대자를 적으로 몰아 죽임으로써 정치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은 닉슨의 사례에서 보듯 결국 정치의 종언과 정치 공동체의 파멸로 이어진다. 나의 승리마저 물거품으로 만드는 불행을 초래한다.

윤 대통령의 정치 혐오는 국회와 지방의회의 활동을 금지하는 계엄 포고령으로 나타났는데, 이 자체로 헌법 위반이다. 모든 정치 과정의 정점에 있어야 할 대통령이 보여준 이런 인식의 종착지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국민 주권의 원칙을 짓밟는 것이다.

국민주권의 원칙이란 시민들의 힘이 공적인 의사 결정 과정을 통제하고 있고, 그 영향력에 있어서 시민들 사이의 권한이 평등함을 의미한다. 현대 민주주의의 미래는 과두제(寡頭制)와 민중주의 사이에 놓인 좁은 가능성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의사 결정의 비효율과 무능력을 비난하며 전문가를 자처하는 기술관료 중심의 과두제가 득세하거나, 기존 절차와 제도를 파괴하고 집단적 반엘리트 접근을 주장하는 민중주의가 등장할 때 민주주의를 향한 좁은 가능성의 균형은 깨진다. 이 두 방향의 도전에서 민주주의의 생존에 관건이 되는 변수는 시민의 역할과 제도적 구성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시민의 인식 능력과 선동적 자극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에 반응하는 시민의 감성적 능력은 민주주의의 운명을 좌우하는 첫째 변수다. 예컨대 모든 시민은 형법이 규정한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국헌 문란의 폭동에 부화(附和)수행하거나 단순히 관여한 자도 처벌한다는 규정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즉, 나는 잘 몰랐고 우연히 관여했다고 하더라도 내란죄 처벌이 면책되는 것이 아니라는 정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인식 능력을 갖춰야 한다.

시민의 역할과 함께 제도적 구성도 중요하다. 그리스의 정치인 겸 역사가였던 폴리비오스는 그리스인의 관점에서 로마와 그리스 정치 체제를 비교 분석했다. 그는 기원전 6세기부터 1세기까지 로마공화국이 최고 통치자인 집정관, 귀족 중심의 원로원, 민주적 민회 등 다양한 정치 체제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 안정된 혼합정치 제도가 정착한 사례였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현대 민주주의도 혼합정치 체제의 제도적 구성 위에서 더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제도가 갖는 경로 의존성 때문에 기존 제도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지만, 최근 탄핵 정국은 헌정 제도의 재구성에 대해 논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물론 어떤 예상치 못한 도전에도 모든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내가 아닌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한 것들을 물으며 진화하는 독립적인 시민들이 궁극적으로 제도적 재구성을 포함한 우리 민주주의의 앞날을 결정해 나갈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남국 전 한국정치학회장·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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