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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다큐멘토링] 국가 지도자는 '마지막' 각오한 자를 위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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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석 발행인]

노량의 새벽은 치열했다.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왜적은 조명 연합군을 향해 조총을 마구 쏘아댔다. 위기의 상황, 이순신이 나섰다. 아들 회와 조카 완이 간청했는데도, 이순신은 선봉에 섰다. 조선을 위해 이순신은 '마지막'을 각오하고 전장에 섰다. 자고로 지도자란 이런 것이다. 그곳에 오른 이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지금, 우리네 지도자들은 과연 어떤 철학을 갖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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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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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이 벌어지던 날, 새벽부터 순천왜성의 소서행장은 좌불안석이었다. 도진의홍이 이끄는 지원군이 아직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앞바다를 바라보니 장도에는 수많은 불빛이 둥둥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서행장의 눈에는 조선 수군이 경계를 서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러니 출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순신 함대와 정면으로 맞붙으면 물귀신이 될 게 뻔했다. 그런데 멀리 노량 바다 쪽에서 '쿠궁쿵'하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려왔다. 희미하나마 섬광이 오르는 모습도 보였다. 해상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그럼 저 앞 장도의 불빛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소서행장은 물론 휘하 장수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가 "우리가 이순신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 같습니다"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제야 소서행장이 "서둘러라! 최대한 해안가 쪽으로 붙어서 빠져나가야 할 것이다"며 악악거렸다. 순천왜성 섬그늘에 대기하고 있던 함선들이 일제히 노를 저어 장도를 지나쳤다.

그리고는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노량해역과 최대한 먼 거리를 유지한 채 남해도를 돌아 부산포 쪽으로 줄행랑쳤다. 도진의홍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하면 조명 연합수군을 앞뒤로 협공해 물리치고 본국으로 함께 가자는 자신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 그도 그럴 것이 도진의홍의 병력이 아무리 최강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이미 이순신 함대와 맞붙었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라면 이순신의 위장전술에 속은 소서행장이 순천왜성에서 주춤거리다 도진의홍과 합세할 시간을 놓쳤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왜적 지원군의 대열은 노량해협 바다위에서 이순신 함대에 의해 우측 옆구리를 강타당하면서 계속 왼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순신의 노림수는 적의 함대를 관음포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왜적 수군은 관음포의 바다가 호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순신이 깔아놓은 치밀한 수순대로 좌측으로 회피하던 적들의 눈에 때마침 남해도로 향하는 바닷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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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 당시 이순신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봉에 섰다.[사진|더스쿠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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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찾던 길로 판단하고 숨가쁘게 이동했지만, 아뿔싸! 그 길은 관음포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도진의홍의 함대를 관음포쪽으로 몰아간 이순신은 선봉을 자처해 적 함선들을 사냥했다. 뒤늦게 바닷길이 막혀있다는 것을 감지한 적 지휘관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빠져나갈 길을 막고 있는 조선의 판옥선들을 뚫고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남해도 육지로 도망칠 것인가. 일부는 전자를 선택했고, 나머지는 후자를 선택했다. 전자를 선택한 지휘관들이 승선한 왜군 함선들은 죽기 살기로 조선 수군을 향해 달려들며 돌파구를 모색했다. 후자를 선택한 리더들이 이끄는 100여척의 왜군 병사들은 관음포 포구에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결국 남해도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다가 아군의 토벌작전에 모두 죽었다.

돌파구를 찾기로 한 왜적 함선들은 무지막지하게 저항했다. 막무가내로 쏘아대든, 조준사격이 됐든 조총을 마구 쏘아대며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결론적으로 이들 가운데 50여척은 좁은 관음포 해협을 비집고 나와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이순신이 탄 지휘선은 선두에 나서 각종 포와 화살을 쏘아대며 적 함선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압박했다. 이때 이순신의 큰아들 회와 조카 완이 간청했다. "적의 탄환이 일제히 우리 쪽으로 쏟아지니 위험합니다. 게다가 이곳 지명이 이락李落이라 하오니 몸을 보존하소서." 이순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랏일에 죽는 것을 염려할 바 없다. 내 명은 저 하늘에 있으니 너희들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이순신은 태연자약하게 선두에 우뚝 서서 수기를 들어 독전했다. 조선 함선들 사이로 빠져나와 도망치려는 세키부네 함선은 그대로 들이받아 구멍을 내어 버렸다. 도망갈 길을 잃은 적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여명 무렵이었다. 혼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송희립이 적의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 이순신이 방패를 거두고 송희립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적의 탄환들이 '휘리릭' 소리를 내며 그의 갑옷을 뚫었다. 가까운 곳에서 날아온 탄환에 맞은 것이다. 이순신이 휘청하자 아들 회와 조카 완이 급히 달려왔다.

자신이 죽을 것으로 직감한 이순신은 손에 쥐고 있던 수기를 조카 완에게 넘겨주면서 엄중하게 말했다. "싸움이 지금 급하니 내 죽음을 말하지 마라. 그리고 내 대신 네가 싸움을 독려하라." 아들 회와 가노家奴 금이金伊가 이순신을 선실로 옮겼다. 그러자 이순신은 아들 회를 바라보며 "아들아, 나를 혼자 두고 활을 들고 나가 싸워라. 적을 하나라도 놓아 보내지 말게 하여라"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다른 유언은 없었다. 그의 나이 54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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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회는 가노를 부친 곁에 남겨두고 활을 들고 나와 싸웠다. 총에 맞고 기절했다가 다시 일어난 부장 송희립과 군관 김대인, 제만춘 등 함선에서 함께 싸우던 이들은 대장이 전사했다는 것도 몰랐다. 이순신과 외모와 체격이 비슷한 조카 이완이 수기를 들고 독전하는 모습에 당연히 이순신인줄 알고 전투에 집중하고 있었다. 새벽 2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10시간 만인 정오가 돼서야 끝이 났다.

이순신과 진린의 연합수군은 적선 200여척을 당파전술로 격침시키고 150여척을 깨뜨려 반파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관음포에 남은 100여척은 나포했다. 바다 위에서 불에 타죽거나 빠져 죽은 병력은 1만여명에 달했다. 나머지는 육지로 도망갔다가 후일 대부분이 죽임을 당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참전한 2만여명 가운데 1만5000여명이 사망했다. 도망쳐 살아남은 병선은 고작 50여척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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