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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원영 스님의 마음 읽기] 마지막 달에 치러야 할 통과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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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오슬오슬 첫추위가 찾아들더니, 뒤통수가 시려오고 뼛속까지 한기에 점령당한 느낌이다. 그래도 한낮의 햇볕은 따사로운 기품을 잃지 않은 듯하여 모처럼 포행을 나섰다. 불과 어제까지도 절 진입로 주변을 웅성거렸던 낙엽의 자리를 밀어내고, 흰 눈으로 덮인 경이로운 백색 풍경에 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사뿐사뿐 걸어보았다. 햇볕을 쬐니 몸도 마음도 눈 녹듯 누그러진다.

이제 한 해를 돌아보고 정리할 때가 되었다. 경험이 우리에게 일러준 지혜도 꼼꼼히 담아두고, 실수를 토대로 앞으로의 대안도 마련하는 시기이다. 마지막 달에 꼭 치러야 할 통과의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마음 정리’다. 출가자인 나는 사실 삶의 속도가 그렇게 빠르거나 번잡해서는 안 될 터인데도, 어쩌다 보니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조급하고 바쁜 한 해를 또다시 보내고야 말았다.



한 해 보내며 ‘마음 정리’ 할 시간

잘한 일에만 생각 머무르지만

각자 삶에서 ‘쓰레기’ 구분하고

과거 마침표 찍고 새로 나아가야

중앙일보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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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파악 못 하고 세상의 속도에 발맞춰 좇으려다가 나만의 정속을 잃어버린 탓이다. 그러한 연유로 깨진 물동이 이고 온 것처럼 축축한 날이 많았다. 세상일이 그러하듯 정해진 계획대로 실행은 했으나, 내 맘처럼 만족스럽지는 않다. 아무튼 지금은 나의 혼이 제때 따라오지 못할까 싶어 돌아서서 지켜보는 중이다.

이렇게 자기반성에 한창 빠져있는데, 도반 스님이 놀러와 금세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스님들끼리 대화하다 보면 가끔 ‘예쁜 쓰레기’라는 말을 쓴다. 이는 수행자들 사이의 은어라고 할만한데, 말하자면 실제로 삶에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예뻐서 소유하고 싶은 것을 우리는 ‘예쁜 쓰레기’라고 부른다. 이런 ‘예쁜 쓰레기’에 포함된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거추장스러운 삶의 짐이 늘어나는 것이다.

쓰레기라고 해서 비단 물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 쓰레기에 관한 재밌는 일화가 있다. 아잔 브라흐마 스님의 책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를 읽다가 미소 지었던 얘기다. 수행을 열심히 하던 한 일본인 스님이 있었다. 호수 한가운데 작은 섬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수행하기를 3년이 지났다. 그는 자신의 경지가 얼마나 높은지 큰스님에게 인정받기 위해 고급 한지와 붓, 그리고 질 좋은 먹을 주문하여 글을 썼다.

‘젊은 중이 3년 동안 홀로

외딴섬에서 용맹정진한 끝에

세상의 네 가지 바람에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네.’

유려한 서체로 이렇게 사구(四句)를 써서 생필품을 조달해 주는 이에게 건네 큰스님께 전하도록 했다. 젊은 스님은 큰스님에게서 어떤 칭찬이 돌아올까, 큰절 주지 자리라도 맡기지 않을까 생각하며 매우 뿌듯해했다. 며칠 후, 드디어 심부름꾼이 도착했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던 그는 큰스님의 서찰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자신이 보낸 두루마리랑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큰스님께서 보낸 것이라고 하니, 서둘러 펼쳐보았다. 그랬더니 자신이 한껏 멋스럽게 쓴 글귀 옆에 빨간 볼펜으로 이렇게 휘갈겨져 있었다.

‘쓰레기!’

두 번째 행, 세 번째 행, 네 번째 행 옆에도 큰스님의 화답은 똑같았다.

‘쓰레기!’‘쓰레기!’‘쓰레기!’

너무나 화가 난 젊은 스님은 당장에 큰스님을 찾아갔다.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글을 큰스님 앞에 내려놓고는 노려보았다. 그러자 큰스님 왈, “자네는 더 이상 세상의 네 가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면서, ‘쓰레기’라는 네 마디에 당장 호수를 가로질러 달려왔군 그래.”

젊은 스님처럼 내가 잘한 일에만 생각이 머물러 남의 지적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쓰레기 같은 수행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부해도 지속적인 수행의 여정에는 동참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를 굳이 꺼낸 이유는 각자의 삶에서 쓰레기를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정호승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했다. 오죽하면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라고 했을까.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라고 했을까. 외롭고 고단하고 지칠 때는 더러 예쁜 쓰레기가 위안이 될 때가 있다. 누군가의 삶에서는 쓰레기에 불과할지언정 또 다른 누군가의 삶에서는 그것이 ‘행복한 선물’이 되는 법이다. 따라서 각자의 쓰레기 분류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쓰레기 정리를 하든 뭘 하든, 한 해를 정리한다는 것은, 아니 삶을 돌아본다는 것은 결국 자기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다. 매끈하게 단정하지 않아도 좋다. 빈둥거리며 하더라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치러야 할 마음 정리의 시간이다. 이는 결코 과거에 끈덕지게 매달려 집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움조차도 시간의 병 속에 꾹꾹 눌러 담아 야무지게 마침표 찍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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