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신작 '다산의 일기장'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
"다산은 학자이자 정치가, 신자이자 배교자였다"
정민 한양대학교 교수가 3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다산의 일기장'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2024.12.3/뉴스1 ⓒ News1 송원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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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 정신의 완벽한 화신? 젊은 시절의 다산(茶山)은 돌격대장이었고 다혈질이었어요. 수틀리면 들이받기도 했죠."
(서울=뉴스1) 정수영 기자 = 정민(64)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3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다산의 일기장'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처음 다산의 일기를 읽었을 때, 그동안 알던 다산과 다른 모습이 정말 많았다"며 이처럼 말했다.
정민 교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무후무한 실학자, 청렴의 코드, 성인 같은 위인'만으론 다산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며 "젊은 날의 다산을 복원해 '인간 다산'의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번 신간을 펴냈다고 했다.
정 교수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학자이자 '다산 전문가'. 지난 20년 동안 다산 정약용(1762~1836)을 연구해 '다산과 강진 용혈'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등을 통해 역사·문화적 맥락에서 다산의 여러 면모를 되살리는 작업을 꾸준히 펼쳐 왔다.
이번 신작은 33세 다산이 사학삼흉(邪學三凶)으로 몰려 지방으로 좌천된 후 겨우 상경했다가 다시 외직으로 밀려나기까지 2년간의 일기를 다룬다. 이 시기를 정 교수는 "다산 생애에서 가장 격렬하고 긴장이 높았던 시절"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다산이 쓴 일기를 우리말로 옮기고 주석을 더했다. 그리고 100가지 질문과 답으로 다산의 격렬했던 젊은 날을 정리했다.
"다산, 천주와 임금 사이에서 고민 깊었을 것"
정민 한양대학교 교수가 3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다산의 일기장'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2024.12.3/뉴스1 ⓒ News1 송원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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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교수가 다루는 다산의 일기는 총 4종이다.
'금정일록'은 1795년 33세의 다산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됐던 시기를, '죽란일기'는 1796년 금정에서 겨우 상경한 뒤 실직 상태에 있던 명례방 시절을, '규영일기'는 같은 해 규영부 교서관으로 복귀했을 당시를, '함주일록'은 1797년 외직인 황해도 곡산부사로 밀려나기 직전까지를 담은 기록이다.
그는 "이 4종의 일기는 모두 다산의 천주교 신앙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며 "당시에는 말 한마디에 가문의 명운과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산은 임금이라는 하늘과 천주(天主)라는 하늘 사이에서 고민이 깊었을 것"이라며 "천주와 임금 사이에서 엇갈리는 다산의 행보는 그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징표가 아니라, 서학이라는 거대한 체계와 대면한 18세기 조선의 어정쩡한 스탠스를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간담회 말미, 다산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은지를 묻자, 정 교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산에게 하고 싶은 말보다 듣고 싶은 말을 전했다.
"'너 때문에 참 성가시다. 그래도 네가 내 속을 알아주고, 내가 말하고 싶었던 행간을 밝혀 담론화될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 줘 고맙다'란 말을 듣고 싶네요."
정민 교수가 쓴 '다산의 일기장'(김영사 제공) |
jsy@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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