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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 (월)

확신에 찬 거짓말쟁이의 승리 [세계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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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이토 모토히코 효고현 지사. 효고현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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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지로 | 일본 호세이대 법학과 교수



올해 일본에서는 몇가지 중요한 선거가 치러졌다. 지난 10월 중의원 선거에서는 자민-공명 연립여당이 대패해 이시바 시게루 정부가 이례적인 소수 여당이 됐다. 2012년 말 자민당의 정권 탈환 뒤, 여당은 국회를 가볍게 여긴 채, 수적 우위를 앞세워 문제 있는 정책들을 밀어붙여왔다. 교만함은 정치자금을 둘러싼 부정의 일상화로 나타났고, 결국 국민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됐다. 금융 완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 문제의 해결을 미루고 경제 정체, 인구 감소, 사회 쇠퇴도 방치한 데 대한 국민 불만이 선거에서 표면화한 것이다. 선거가 민의를 정치권에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했다.



한편으로는 유튜브나 엑스(X·옛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SNS)가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게 지방선거에서 드러났다. 지난 7월 도쿄지사 선거에서 히로시마현 소도시 시장을 지낸 이시마루 신지 후보가 소셜미디어 운동 방식으로 200만표 가까이 득표했다. 지난 11월 효고현 지사 선거에서는 현 의회에서 불신임을 받아 지사직을 잃었던 사이토 모토히코 전 지사가 예상 밖 승리를 거뒀다.



특히 문제는 효고현 선거다. 사이토 전 지사는 지사 시절 ‘파워하라’(직장 내 괴롭힘)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행동으로 내부 고발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고발자를 특정했다. 해당 고발자는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 의회가 사이토 전 지사를 불신임한 데는 근거가 있다. 진상 규명과 내부 고발자의 명예 회복이 효고현 정상화에 꼭 필요한 상황에서 사이토 전 지사는 결백을 주장하며 보궐선거에 다시 입후보했다.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소셜미디어 선거 캠페인을 벌였다. 이 가운데는 그의 직장 내 괴롭힘 의혹이 기득권을 지키려는 현 의회의 음모라든가, 내부 고발 직원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등 허위 정보가 넘쳐났다. 거짓 정보가 넘쳐나면서 사이토 전 지사는 피해자 같은 이미지를 얻었고, 선거 막바지 지지세를 넓혔다.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이 효고현 지사 선거 출구조사에서 한 ‘투표에 가장 중요하게 참고한 게 뭐냐’는 질문에 ‘소셜미디어와 동영상 사이트’라는 답이 30%, 텔레비전과 신문이 24%로 나타났다. 또 ‘소셜미디어와 동영상 사이트’라고 답한 이들의 70% 이상이 사이토 전 지사에게 투표했다. 이제 소셜미디어는 전통적인 매스미디어와 거의 같은 수준의 영향력을 갖게 됐다. 텔레비전과 신문은 진실 보도라는 사명을 갖고, 근거 확인과 팩트체크를 한다. 하지만 소셜미디어 정보에는 허위사실이나 거짓, 혹은 경쟁 상대에 대한 비방이 포함돼 있다.



소셜미디어 이용자 가운데는 정보가 사실인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이들은 전통 미디어에 불만과 반감을 갖고, 사실 검증과 거짓 폭로가 오히려 ‘거만한 태도로 남을 깔보는’ 권력적 태도라고 반발한다. 이번 선거에서 유튜버 중 악명 높은 인플루언서들이 사이토 전 지사를 지지하며 상대 후보에 대한 비방과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이들은 진위에 상관없이 조회수가 많으면 이익이 되는 만큼 자극적 표현을 써서 거짓을 퍼트리려 한다. 이런 속임수를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라고 부른다. 확신에 찬 거짓말쟁이들이 주목 경제를 추구하기 위해 선거를 이용한 게 이번 효고현 지사 선거였다. 정치와 소셜미디어의 관계가 새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대책은 간단치 않다. 민주주의는 사실을 공유하며 각자 신념에 따라 후보를 뽑는 걸 전제로 성립된다. ‘진실’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나 자신이 믿는 사실만이 ‘진짜’라는 광신주의가 확산하면 민주주의는 붕괴된다. 허위·비방과 싸우며 논의 방식에 관한 새 규칙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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