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사진 No. 89
남쪽과 북쪽으로 각각 향하던 열차가 정면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었습니다. 신문사에서는 이 사건을 1924년 11월 28일자 조간 신문과 석간 신문을 통해 사고 내용을 우선 상세히 보도하는 한편 사진기자를 현장으로 급하게 파견합니다. 1924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사진 3장과 함께 출장을 간 사진기자의 취재 후일담에 실렸습니다. 기사 제목은 “본사 특파 사진반 고심 촬영 – 급행열차 정면 충돌 화보”입니다.
◇병신된 기관차/ 1924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 2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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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발생 경위
1924년 11월 27일 목요일 새벽, 중국 룡진강 철교 위에서 대형 열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날 새벽 1시경 남북으로 운행 중이던 두 열차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화물열차와 급행열차 모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고는 안동현(현 중국 단둥)을 출발한 제72호 화물열차가 신막역을 지나 한포역으로 진입하던 중 발생했습니다. 당시 부산을 떠나 봉천(현재 중국 선양)으로 향하던 제5호 급행열차와 룡진강 철교를 못 미쳐 정면으로 부딪힌 것입니다. 이 사고로 두 열차의 기관차는 물론 화물열차 전부 화차 두 량이 크게 파손되었고, 급행열차의 수하물차와 유리창이 부서지는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제72호 화물열차는 통상적으로 먼저 한포역에 도착해 급행열차를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약 5~6분 늦게 도착해 급행열차와 거의 동시에 역에 도착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급행열차는 신호를 받지 못하고 룡진강 철교 위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한편, 제72호 화물열차가 역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으나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전철기를 깨뜨리고 대기 중이던 급행열차와 정면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사고 보도와 사진기자의 취재 과정
당시 사진기자는 급하게 준비해서 현장을 찾아갑니다. 사고가 발생한 27일 오후, 편집자로부터 “내일 신문에 게재할 수 있도록 꼭 촬영하라”는 부탁을 받고 카메라를 들고 출발한 그는 오후 5시 5분 신막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기차는 예상보다 세 시간 늦은 밤 8시 50분에야 한포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밤중에 역장을 설득해 사고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심야에 비까지 내리는 악조건 속에서도 역에서 약 한 마장(약 4km) 떨어진 룡진강 철교까지 걸어가 사고 현장을 촬영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관차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으나 이미 파손된 기관차는 각각 평양과 용산으로 옮겨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급히 평양으로 이동해 기관차를 촬영하고 새벽 4시 반 개성역에서 사진을 확보한 뒤 아침 9시 40분 경성으로 돌아와 신문에 보도할 사진을 완성했습니다. 사고 발생 이틀 뒤인 11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사고 현장을 담은 사진과 사진기자의 취재기가 실렸습니다.
◇수직하는 현장 광경/1924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 2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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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밥된 물화차/1924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 2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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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한 사진 보도 환경
이 사건은 과거와 현재의 사진 보도 환경을 비교할 때 여러 변화를 시사합니다. 우선 전송 기술의 발전이 있습니다. 당시 촬영한 사진이 독자들에게 전달되기까지는 24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사진기자는 필름을 들고 서울 본사로 돌아와 현상과 인화 과정을 거친 후 신문 제작팀에 전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늘날에는 무선 통신망을 통해 사진을 즉시 전송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SK텔레콤의 CDMA 기술이 도입된 이후, 신문사 사진기자들은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을 즉시 본사로 보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사진기자가 아닌 시민들이 열차에 타고 있었다면 휴대폰으로 촬영해 언론사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취재 환경도 과거와 현재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1924년 당시 사진기자는 역장을 설득해 현장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보안과 안전상의 이유로 기자들이 공식 요청을 해도 거절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히 공무원들이 불리한 상황일 경우, 기자증의 권위로 취재 협조를 받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이는 2000년대 초반 이후 크게 달라진 모습으로, 이제는 기자가 스스로 방법을 찾아 현장에 접근해야 합니다. 공무원들은 오히려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에서만 언론을 활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
●후일담
사진기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고 현장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의 고단함은 글에 고스란히 묻어났습니다. 당시 그는 취재를 마치고 “성공은 했으나 후유증이 남는다”고 말하며 글을 마치고 있습니다. 기사는 ‘후유’라고 마무리 되었지만 어떤 후유증이 있을까 100년 후의 사진기자인 제 경험에서 유추해 보았습니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던 1997년 6월 중국 단둥역에 출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북 식량 지원이 시작되는 날이었는데 원래 출장 계획이 있던 선배가 중국 당국으로부터 비자 발급이 지연되면서 저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입사 7개월, 정식 기자가 된지 3개월 만에 해외 출장을 가는 파격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되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전날 밤(그 시간 저는 집에 안 가고 회사 근처에서 선배들과 시끌벅적하게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에 의사결정이 되어 제가 출장을 가게 되었고 비행기 티케팅은 회사 여행사와 항공사 홍보팀을 통해 ‘급행’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중국 선양 공항에 내려 택시를 4시간 동안 타고 단둥역에 도착하니 이미 밤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새벽에 움직일 것으로 예상되는 북한행 열차 시간을 알아내기 위해 단둥역의 중국인 근무자들을 깨웠습니다. 다행히 압록강 철교를 지나 북한으로 들어가는 열차를 촬영할 수는 있었지만, 저를 비롯한 한국 기자들은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몰래 서울에 전송까지 마쳤지만 8시간 안에 단둥을 떠나라는 추방 조치를 받았습니다. 가는 데 12시간, 촬영 가능 시간과 촬영 포인트를 확인하느라 밤을 새고 공안의 조사 후 바로 추방되어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를 타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 일정 동안 제 등과 어깨에는 총 5개의 가방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카메라 가방, 망원렌즈 가방, 노트북 가방, 스캐너 가방, 현상인화 키트 가방 등이었습니다. 출장에 필요한 옷가지와 세면도구들은 따로 가방으로 챙기지 않고 각각의 가방 여유 공간에 조금씩 나눠 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방송 기자와 달리 신문사 사진기자들은 혼자서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보조도 없고 취재기자와 동행하는 경우보다 따로 움직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수면 시간과 끼니를 챙길 수 없는 조건도 있었네요.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게 20대의 젊은 사진기자에게는 중요한 조건이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출장을 다녀오면 어깨와 등에 채찍을 맞은 듯한 흔적이 남았었습니다. 가방의 끈들이 몸을 짓누르기 때문에 피가 뭉쳤던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몸에 피로감이 남는 것만이 취재의 후유증은 아닙니다. 인간 관계에 대한 후회도 꽤 남습니다. 현장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윽박지르고 달래는 과정이, 취재가 끝나고 곱씹어 보면 무례하고 무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취재하는 저를 만나셨던 분들 중에 그런 기억이 있으시다면 이 글을 통해서나마 사과 드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100년 전 열차 사고 사진을 찍었던 사진기자가 말하는 ‘후유’라는 것도 그런 회한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오늘도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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