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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광화문은 광고판이 아니다 [인문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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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한국일보

지난 2023년 10월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 새로운 현판과 월대가 공개되는 가운에 미디어 파사드가 상영되고 있다. 최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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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의 여왕 빅토리아 1세를 지켜주소서(DOMINE SALVAM FAC REGINAM NOSTRAM VICTORIAM PRIMAM)' 영국의 상징, 일명 ‘빅벤’의 거대한 시계 테두리에 적힌 글이다. 영어가 아니라 라틴어다. '하느님을 찬양하라(LAUS DEO)' 미국 독립의 상징 워싱턴 기념탑에 적힌 글이다. 역시 영어가 아니라 라틴어다. 자유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책에도 미국의 독립기념일 1776년 7월 4일이 로마 숫자로 적혀 있다.(JULY IV MDCCLXXVI)

라틴어는 이탈리아 라티움 지역에서 기원한 언어다. 이곳에서 굴기한 로마 제국이 지중해 일대를 지배하면서 유럽 각지로 퍼졌고, 로마가 멸망한 뒤에도 여전히 널리 쓰였다. 라틴어는 중세 유럽의 공동 언어였다. 유럽 사람은 라틴어를 ‘이탈리아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국의 문화유산으로 받아들인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을 상징하는 문화재에 영어가 아니라 라틴어를 썼다고 시비거는 사람은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한자가 라틴 문자의 역할을 맡았다. 한자는 중국만의 것이 아니다. 중국도 쓰고 한국도 쓰고 일본도 쓰고 베트남도 썼다. 한자는 동아시아의 공동문자다. 라틴어가 유럽 각국의 언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처럼, 한자도 동아시아 언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의 한자 비중을 생각해보자. 한자가 중국 문자라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다.

지난 한글날, 문화부 장관이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국가유산청은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문화재의 보존, 관리 및 활용은 원형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한다.”는 문화유산법에 따른 원칙적이고 합리적인 입장이다. 문화부 산하의 국가유산청이 장관의 발언에 반대 입장을 공식 표명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만큼 장관의 발언이 전문가의 상식에 어긋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종로구 의회도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바꾸자는 건의안을 채택했다. 외국인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방문하는 광화문의 현판이 한자로 쓰여진 것이 안타까워서란다. 하지만 외국인 관광객의 방문지는 1위가 명동, 2위가 동대문이다. 외국인 관광객이 문화재 관람보다 쇼핑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외국인에게 보여주고 싶다면 남대문이나 동대문의 현판을 한글로 바꾸자고 해야 할 것이다. 유독 광화문 현판에 집착하는 건 외국인 관광객 때문이 아니다. 수도 서울의 중심, 광화문의 상징성을 제것으로 만들려는 의도다.

다른 나라의 문화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다른 나라에서 유래한 문자를 사용했다고 멀쩡한 문화재를 뜯어고치는 국수주의적 태도를 보이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바꾸겠다는 사람들은 광화문을 옥외광고물 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광화문은 광고판이 아니라 문화재다. 제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도 문화재는 함부로 손댈 수 없다. 문화재는 고유한 옛모습을 지킬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한국일보

장유승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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