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윤 영화평론가(dongyunlee08@gmail.com)]
사악해져야 생존할 수 있는 세계
영어 형용사 queer(괴상한), weird(기이한), bizarre(별난)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비정상적이라 여겨지는 대상들에 붙여진다. 정상성에서 벗어난 존재들이기에 이 단어 속엔 부정적, 때로는 혐오적 시선과 감정들이 담겨져 있다. 하나의 기호로서 단어에 담긴 뜻과 뉘앙스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재구성된다. 혐오 표현이었던 queer가 성소수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지칭하는 단어로 받아들여졌던 과정처럼, 그 단어에 기입된 지울 수없는 부정적인 인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LGBTQ+로 다시 정정한 과정처럼, 단어에 기입된 의미는 시대에 따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집단들의 목적에 따라 전복될 수 있다.
하지만 wicked는 좀 다르다. 이 단어는 단순히 정상성에서 벗어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악함'을 의미한다. 국어사전은 '사악邪惡'을 '간사하고 악함'으로 정의한다. 자기 이익을 위해 원칙을 따르지 않고 꾀에 따라 변하는 악한 자들, 그들이 사악한 존재다. 영화 <위키드>는 이 단어를 소수자 혐오의 단어로 차용하고 위키드로 불리는 당사자가 적극적으로 사악해지는 과정을 담는다. 그리고 queer라는 단어의 역사가 그러했듯, 소수자에게 덧씌워진 '비정상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바에야 차라리 그 비정상성 자체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스스로를 괴상하고 기묘한 존재로 호명하는 것과 간사하고 악한 존재로서 호명하는 것은 절대 동일할 수 없다. 전자와 후자 사이의 차이를 결정 짓는 것은 대상을 향한 혐오의 강도다. 이상함을 너머 사악한 존재로 낙인찍는 사회에서 소수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더욱 단단하게 무장해야만 한다. 스스로를 사악한 존재로 표명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비극적 딜레마가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 글린다와 쉬즈 대학교의 학생들. ⓒ영화 <위키드>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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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 불가능한 알파바의 사악한 마법의 힘
영화 <위키드>는 이러한 현실을 좀 더 강조하고 부각시키기 위해 뮤지컬 '위키드'가 놓치고 있는, 또는 슬쩍 언급만 하며 넘어가는 서사의 모든 인과관계에 부연설명을 더하고 선명한 인증을 남긴다. 이는 영화 <위키드>의 장점이기보다 뮤지컬과 영화 매체가 갖는 형식적 차이로부터 기인한다. 나무 상자 하나가 거대한 산맥으로 은유 될 수 있는 무대의 힘은 전적으로 관객의 상상력에 의지한다. 관객이 적극적으로 상상하지 않으면 나무 상자는 절대 산맥이 될 수 없다. 반면 영화는 실제 산맥을 기록하여 제시하고 그 산맥이 얼마나 거대하고 위협적인지 시각적 효과로 강조한다. 영화는 상상력이 아닌 본 것을 그대로 믿게 만드는, 그래서 상상의 여지를 최대한 줄여냄으로서 몰입을 유도한다. 마담 모리블(양자경)은 마법을 “상상력을 통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상상력의 산물인 마법이 현실을 바꿔내는 힘을 지닌다는 것이다. 모리블에 따르면 마법의 힘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엔 사실적 재현을 도구로 삼는 영화보다 관객의 상상력을 강조하는 뮤지컬이 더 어울려보인다. 영화 <위키드>는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마법의 위험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뮤지컬 '위키드'의 마법이 상상적인 것의 귀환이라면 영화 <위키드>의 마법은 실재적인 것의 귀환이다. 마법은 세상을 구원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위협할수도,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는 것이 영화 <위키드>의 입장이다.
영화의 서사는 그러한 마법을 각성하는 알파바(신시아 에리보)의 감정 변화에 주목한다. 알파바의 마법은 그녀가 받은 상처에 뿌리를 둔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큰 만큼 그녀는 마법의 힘을 통해 주변을 두려움에 빠트린다. 상처입은 자가 휘두르는 날선 칼날은 타인을 무심코 베어낼 수 있지만 칼을 휘두른 자는 자신의 상처에 함몰되어 타인에게 상처주었단 사실은 인식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알파바는 자신의 마법이 상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날선 차가움을 드러냄으로서 타인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려 든다.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친해져서 상처받는 것 보다 낫다는 주의다. 사랑받지 못한 자가 세상을 혐오하고 타인에게 날카로운 칼날을 내세우는 것은 결국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갑옷에 불과하다. 혼자 힘으로 마법의 힘을 자각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그녀를 위해서 <위키드>의 서사는 알파바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망을 촘촘히 살핀다.
▲ 함께 거울을 바라보는 알파바와 글린다. ⓒ영화 <위키드>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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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에 담긴 인물들의 성장
알파바를 중심으로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와 피예로(조나단 베일리)가 만들어내는 삼각관계는 사랑의 감정을 덧입고 서사 표면을 흐른다. 금수저인 글린다와 피예로의 예상 가능한 만남, 하지만 본질적으로 서로의 숨겨진 내면을 알아봐주고 이를 통해 사랑을 깨닫는 알파바와 피예로의 비극적 관계, 원수에서 친구로, 다시 적대적 관계에서 서로를 지켜주는 존재로 발전하는 알파바와 글린다의 우정이 그 핵심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관계를 카메라로 근접하여 촬영함으로서 서사 표면 아래에 담겨진 본질을 담아낸다. 서로 다름이 어떻게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지, 감정적 적대 관계 속에서 어떻게 우정이 꽃 피울 수 있는지, 시대의 요구 속에서 드러내지 못한 감정들이 어떻게 발견될 수 있는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것만 같은 상황들이 판타지의 옷을 입고 표현된다.
그 과정에서 알파바와 글린다, 피예로는 모두 각자의 변화를 겪으며 성장한다. 인물의 성장이 서사를 이끄는 중요한 동력이라면 <위키드>는 그 동력을 원료 삼아 시대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려는 자들의 몸부림을 기록한다. 알파바는 시대적 평화라는 허울을 위해 소수자를 희생양 삼는 사회구조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글린다는 자신의 특권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소수자의 아픈 내면을 발견하고 이를 수용하며, 피예로는 자신의 반항기가 정상성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뮤지컬 넘버 'Dancing Through Life', 'Popular', 'I'm not that girl'에 담겨진 성장의 순간을 영화는 파티장에서 흘리는 알파바의 눈물, 머리에 꽃을 꽂아주고 함께 거울을 바라보는 글린다의 표정, 새끼 사자를 품고 도망치다 얼굴에 난 피예로의 상처로 은유한다.
<위키드> 만의 사실주의적 뮤지컬의 힘
감추어진 감정들을 발견하고, 그에 공감하고, 대립적 상황에서도 서로의 사상을 교류하는 이상적 현실은 분명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선 마법이 통하지 않고 알파바와 같은 소수자가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선 적지않은 희생이 뒤따른다. 마담 모리블의 설명처럼 마법의 본질이 상상력에 있다면 <위키드>가 취하는 뮤지컬 장르는 불가능한 현실을 꿈꿀 수 있도록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형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헐리우드에서 완성된 뮤지컬 형식이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려 했던 것과 달리 <위키드>의 뮤지컬은 적극적으로 현실을 끌어 들이고 은유하여 이상향을 가상적 실재로 드러내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스스로를 사악한 존재로 표상하는 알파바를 통해 극적 카타르시르를 선사한다. 적극적으로 악한 존재가 되기로 결정한 자를 보며 감동하는 영화적 상황이야 말로 이 시대의 비극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아닐까?
뮤지컬을 본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년에 공개될 2부는 1부보다 더 빠른 서사의 속도감 속에서 깊은 비극의 카오스에 빠질 예정이다. 1부에서 억눌렸던 개개인의 욕망들은 2부에서 왜곡된 행동으로 표출되어 서로의 관계를 할퀴고 파편화 시킨다. 각자가 원하는 결과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게 될 것이며 비록 정의는 실현되겠으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 또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쯤 되면 <위키드>의 서사가 현실의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판타지임에 분명하지만 현실이 더 판타지로 여겨지는 요즘의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위키드>가 오히려 사실주의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무엇이 되었든 상상의 힘으로 마법을 실현시킬 수 있다면 우리의 현실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이동윤 영화평론가(dongyunlee0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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