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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오스카 쉰들러의 쌍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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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크닐리 ‘쉰들러의 방주’ vs 스티븐 스필버그 ‘쉰들러 리스트’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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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말등 안장에 올라 마을 전체를 내려다봅니다. 그의 눈과 귀에 비친 풍경은 이랬습니다. 총성이 울리고 비명이 들리고 사람들이 쓰러집니다. 의식을 잃은 육체들이 마치 버려져야 할 사물처럼 쌓이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오스카 쉰들러. 눈먼 돈으로 공장을 차리고 전시물자 납품으로 큰 돈을 벌려던 기회주의자 쉰들러는 학살 풍경을 보며 경악 끝에 회심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다른, 문자적 의미로서의 인간으로 살길 바란 것이지요. 나치의 학살 속에서 유대인 수 천 명을 구해낸 유대인들의 숨겨진 영웅을 그린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설정입니다. 부연이 필요 없는 걸작이지만 <쉰들러 리스트>가 소설가 토마스 크닐리의 1982년 소설 <쉰들러의 방주(Schindler‘s Ark)>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란 사실은 덜 알려진 듯합니다. <쉰들러의 방주>는 국내에서 신판으로 구할 수가 없고, 영화 개봉시기인 약 30년 전 출간된 몇 개의 판본으로만 전해지는데, 이 역시 구매가 쉽지는 않습니다. 중고서점을 통해 <쉰들러의 방주>를 구했습니다(1994년 2월 청담문학사 출간 초판, 한국어판 제목은 ‘쉰들러의 리스트’이나 이하 ‘방주’로 표기함). 자세히 들어가 봅니다.

신의 엔진
도이치법랑주식회사의 대표인 쉰들러는 나치의 홀로코스트(인종 청소)에서 다수의 유대인을 자신의 공장에 고용합니다. 그의 공장에 취직하면 강제노동수용소 게토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고, 적어도 나치 군인들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예고도 없이 총살될 가능성이 적었기에 쉰들러의 공장은 현실판 ‘노아의 방주’였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전쟁이 끝나자 오스카 쉰들러는 유대인들의 환송을 받으며 길을 떠납니다. 그때 자신과 함께 유대인을 구출했던 조력자 이츠하크 스테른에게서 선물을 받습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금니를 뽑아 그에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담아 만든 금반지였습니다. 반지의 안쪽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쉰들러는 이 반지를 받으며 울컥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눈물을 쏟지요. 그런데 소설을 보면 저 문구는 유대인이 만든 반지에서 처음 등장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영화엔 없는 이야기이지만, 소설에서 쉰들러는 어린 시절 이웃집 랍비 칸토르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칸토르는 ‘유대인인 동시에 독일인이 되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라고 생각한 인물로 나치의 사상과는 정반대에 있었습니다. 쉰들러는 시간이 흐른 뒤 조력자 스테른을 처음 만났을 때(학살이 본격화되기 이전)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쉰들러가 “지금과 같은 시대에 교회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제비 한 마리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신다‘고 설교하기는 곤란할 것”이라고 뼈 있는 농담을 하자, 스테른은 “그걸 탈무드식 표현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쉰들러의 방주> 상권, 79~80쪽)라고 말합니다. 즉, 이는 소설 초반부에서 스테른이 쉰들러의 심중에 씨앗처럼 심어둔 말이었는데, 그 문구가 훗날 금반지에 새겨진 것이지요. 이것은 뭘 의미할까요.

세상은 악(惡)이라는 거대한 광기의 엔진이 작동하던 때 였습니다. 한 민족집단 전체를 범죄자로 내몰아 전례 없는 탄압을 가했습니다. 영화는 말등에 오른 쉰들러의 첫 번째 회심 이후, 목숨을 걸고 자신의 늙은 부모를 취직시켜 달라고 부탁한 젊은 여성과의 만남(두 번째 회심)의 과정을 거쳐 쉰들러가 끝내 ‘각성’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소설은 이토록 참혹한 시대에도 신의 예정된 선(善)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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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과 유대인의 공존, 생명을 구하는 일의 존귀함이 쉰들러의 의식 내에서 작동하도록 설정됐기 때문입니다. 쉰들러는 영화에서 그려지듯이 바람기 많은 호색한에 지독할 만큼의 주량을 가진 술꾼이었고, 전쟁을 이용해 거대한 부를 쌓으려던 속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선한 엔진’은 사회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소설과 영화의 두 번째 차이점은, 오스카 쉰들러와 아몬 괴트와의 묘한 관계입니다.

괴트는 쉰들러와 소통하는, 강제노동수용소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쉰들러는 괴트를 꾀어 유대인을 구출하는데 관객은 쉰들러를 선으로, 괴트를 악으로 나눠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소설을 자세히 읽어보면 쉰들러와 괴트는 사실 닮은 인물입니다. 둘은 첫째, 태어난 해가 같은 동갑이고, 둘째, 어린 시절부터 천주교 신자로 자랐습니다. 술독에 빠져 살고 여성과의 잠자리를 즐기는 등 ‘취미’까지 같습니다. 소설에서 쉰들러와 괴트는 이처럼 정신적 쌍둥이에 가깝게 그려집니다. 관객이 보는 것처럼 선과 악의 대비를 이루지 않고, 쉰들러와 괴트 서로가 상대를 바라보면서 자신과 닮았음을 인식하기에 이르지요. 작가 토마스 크닐리는 이렇게 두 사람을 그립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아몬의 포악하고 광적인 사형집행인의 모습은 오스카의 어두운 면일 수도 있다. 만일 오스카의 욕망이 불운하게도 좌절을 거듭한다면, 얼마든지 아몬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상권, 266쪽) 즉 인간은 과거의 자신이 어떠했든지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는 복잡하고 미묘한 인물임을 소설은 간파해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 텐데, 쉰들러는 공장을 체코의 한 마을로 이전하게 됩니다. 쉰들러와 유대인들이 도착한 이주지는 새로운 에덴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설에선 괴트가 이곳을 방문하는 장면이 뒷부분에 삽입됐습니다. 감옥에 수감됐다가 당뇨 질환이 깊어져 풀려난 괴트는 여전히 쉰들러를 친구라고 여겨 그를 찾아갔습니다. 괴트는 그 와중에도 자신에게 인사하지 않는 작업장의 유대인들을 보면서 “건방진 유대인을 처벌하라”고 ‘친구’ 쉰들러에게 부르짖지요(하권, 293쪽). 유대인들은 무서워 괴트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합니다. 이미 그가 권력을 잃었는데도 말이지요. ‘다시 찾아온 아몬 괴트’ 장면은 이 소설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줍니다.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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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차이점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포스터에도 등장하는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를 중심으로 발견됩니다. 말등 안장에 오른 쉰들러는, 어린 소녀가 악마가 사람을 죽이는 거리를 유유히 걸어가는 장면을 보고 회심하기 시작했다고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영화는 시간이 흘러 빨간 코트를 입은 이 소녀가 주검이 되어 수레로 실려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지요.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의 사망이 확인될 때 관객은 절망하고 영화가 보여주는 비극성은 극대화됩니다. 그런데 소설에선 그 거리를 걸어 다니던 소녀의 생존 여부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소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영화만의 관심사이지요. 대신 작가 토마스 크닐리는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가 극도로 위험한 거리를 돌아다니는데도 아무도 그 소녀를 제지하거나 보호하려 하지 않는 무참한 시대의 인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빨간 코트의 소녀는 나치 군인이 한 여자의 목을 쏘는 광경을 무심히 바라봅니다. 이때 쉰들러는 나치 군인들이 소녀의 머리를 살해해주기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그런 끔찍한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느니 차라리 소녀는 죽이는 것이 ‘자비’라는 간절하고도 영혼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쉰들러는 왜 친위대 대원이 소녀를 라이플 총 개머리로 내려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상권, 205쪽) 소설은 이처럼 아이에게 악을 ‘관람’하게 하는 일에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세상을 질타합니다. 차라리 아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쉰들러의 마음은 소설 문장에 그대로 재연됩니다.

‘리스트’의 두 의미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1994년 3월 한국에서 개봉한 작품으로, 올해가 30주년입니다. 인간의 존엄이 더러운 총성으로 비껴나가던 시기를 그린 이 작품은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지요.

역사의 무대에서 인간은 자주 훼손됐는데 그 야만은 결코 치유되거나 해소될 수 없는 때가 많았습니다. 원작 <쉰들러의 방주>는 좀 더 깊은 논의를 진행하면서 저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하는데, 나치 장교들 중에서도 자살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실제 사실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악마가 되길 거부하며 목숨을 끊은, 선량한 부역자들 말이지요. 제목의 ‘리스트(list)’와 관련해서도 잠시 고민이 필요합니다. 우선 ‘쉰들러의 리스트’란 쉰들러가 스테른과 함께 구해낸 유대인 이름의 전체 명단을 뜻합니다. 그러나 소설은 이 제목이 중의적으로 표현됩니다. 나치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자 쉰들러는 나치 부역 혐의로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훗날 쉰들러가 검거됐을 때 실은 그가 유대인 수천 명을 살렸다는 문서를 만들고 전원(全員)이 서명합니다. 따라서 ‘쉰들러 리스트’는 쉰들러가 구출한 유대인의 명단이면서 동시에 ‘쉰들러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들이 서명한 명단도 됩니다. 육체는 사라지지만 인간은 남습니다. 저 리스트에 담긴 마음을 압축하는 오직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인류애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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