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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드라마가 그리는 여대와 여대생…그리고 동덕여대 ‘공학 반대’ 시위[이진송의 아니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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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애화하거나 ‘페미’ 인식…여대를 보는 비뚤어진 눈에 저항한다

경향신문

JTBC 드라마 <내 ID는 강남미인>(왼쪽 사진)과 JTBC 드라마 <설강화>의 한 장면. JT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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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서울 동덕여자대학교의 재학생들은 대학 측이 대학발전 계획을 검토하며 일방적으로 ‘남녀공학 전환’을 논의한 사실에 반발하여 학내 시위를 시작했다. 이미 전국의 많은 여자대학교가 공학으로 전환하며 사라진 가운데, 다른 여대에서도 일부 단과대나 유학생에 한하여 남녀공학 전환을 검토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동덕여대 시위는 다른 여대와의 연대 시위로 확산되었다. 동덕여대 시위는 학교의 일방적이고 비민주적인 행정 절차에 학생들이 반발한다는 것만으로 당위가 충분하지만, ‘여대’생들이 ‘공학 전환을 반대’, 즉 ‘여대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다는 이유로 여성혐오의 표적이 된다. 패기 없는 청춘을 패기 바쁘더니, 정작 동덕여대 시위는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애들’의 징징거림 정도로 비하하는 것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시위에 참여한 주체가 피해보상금 폭탄을 맞고 망하기를 기대하는 모습’은 가관이다. 이런 비난과 조롱은 물론, 여성들을 위협하고자 시위 현장에 침입하려는 남성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여대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현대 예술이다. 한편 여성 전용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공학 대학의 성차별이 언급되자 남성중심적 대학 문화에 지친 공학 대학의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지지를 표했다. 동덕여대 공학 전환 논란은 층위가 다른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복합체이다. 여기에는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대학 소멸의 위기(공학도 포함), ‘인서울’ 대학을 둘러싼 학벌주의와 지역차별, 안전과 보호의 논리 등이 포개져 있다. 그러나 여대라는 공간의 특수성 그리고 여대생이라는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고서 이 문제를 파악할 수도 없다. 오늘은 남자대학교와 ‘남대생’은 없는 현실에서, 미디어는 여대와 여대생을 어떻게 재현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여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분열되어 있다. ‘페미’ 정체성과 ‘여성성이 극대화된 여성’으로서의 낭만화와 성애화다. 먼저 전자의 경우. 동덕여대 시위를 향한 비상식적인 적의에는 ‘여대=페미니스트’라는 공식이 도사리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여대혐오’를 견인해온 믿음이다. 페미니즘은 성평등을 추구하는 학문이며,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면 성차별주의자이지만 단어의 의미가 오염됐다. 이전에는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변질된, 강성한 페미니스트만을 비난’한다며 ‘꼴페미’가 쓰였지만 이제 접두어 ‘꼴’이 탈락하고 ‘페미’라는 말이 낙인으로 쓰인다. 페미니즘 자체가 악의 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도쿄 올림픽 3관왕인 안산 선수가 쇼트커트를 했으니 페미니스트라며 괴롭힘을 당할 때, 그가 여대에 다닌다는 사실은 ‘페미설’에 힘을 실어주는 근거로 작동했다. 이러한 ‘페미사냥’(이민주 지음, 민음사, 2024)의 역사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고, 시대별로 다른 양상을 띠며 무수히 반복되었다. 여대에서 페미니즘을, 페미니즘에서 여대를 연상하는 발상은 페미니즘을 ‘여대 바깥의’ 여성과 격리하고, ‘일부 여대 여성들만의’ 행위로 제한하여 정치적 의미를 축소하는 시도이다.

그러나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여대는 관음과 낭만화의 대상이다. 페미니스트 양성소라는 비난과 달리, 언제나 철저하게 탈정치화되고 여성화된 공간으로 묘사된다. ‘금남의 구역’이라는 표현은 사회와 격리되어 ‘여대생’의 ‘여성성’과 ‘순결함’이 보호받는 상상적 공간으로서 여대를 구성한다. 대표적인 예가 드라마 <설강화>(JTBC)다. 작중의 ‘호수여대’는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을 배경으로, ‘호그와트냐’는 비난을 받을 만큼 비현실적인 외관에 ‘아련’하고 ‘몽롱’한 공간으로 연출된다. 여대생들은 쥐가 나왔다는 말에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고, 운동권으로 설정된 소수를 제외하면 꽃무늬, 퍼프소매, 레이스 등으로 치장한 채 미팅에 열을 올린다. 실제로 학생운동 당시 여대생들의 참여가 활발했음을 외면하는 이와 같은 재현은 명백히 의도적이다. 정한아의 소설 <친밀한 이방인>을 드라마화한 <안나>(쿠팡 플레이)에서 유미(수지)는 여대에 입학했다고 부모에게 거짓말을 한 후 반수를 시도한다. 그러나 유미는 이내 여대의 생활에 ‘물들어서’ 명품 가방과 옷을 사들이고 데이트를 하느라 바쁘다. 박찬효의 저서 <한국의 가족과 여성혐오, 1950~2020>(책과 함께, 2020)은 각 시대의 바람직한 가족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여성과 여성 집단의 이미지를 형성하는지 신문 기사,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규명한다. 이 중 1971년 9월2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여대생은 단화를 신으라- 고대 ‘민족사상연’, 이대 앞서 이색 데모>라는 기사를 소개한다. 사치 풍조를 배격하자는 현수막을 든 고대생들이 여대생들에게 “다방과 과자점으로 향하는 그대들의 발걸음을 서점으로 돌려라. 귀부인과 같은 그 손가락으로 쌀을 씻어라. 달랑거리는 핸드백을 내던지고 두툼한 책가방을 들어라”라는 내용의 전단을 돌렸다는 내용이다. 사회 문제에는 관심 없고 허영에 찬 여대생을 ‘진짜 대학생’이 가르쳐야 한다는 감성은 2000년대 이후의 된장녀 담론이나 1920년대의 ‘모던 걸은 못된 걸이다’ 주장과도 통한다.

오랫동안 ‘여대=페미니즘’ 도식화
여대 바깥의 여성과 격리시켜
여대 혐오 견인해온 믿음 낳아

각종 미디어가 재현하는 여대는
관음과 낭만화 대상에 머물러
결국 탈정치화된 공간으로 형상화

여성은 격리된 채 사는 존재 아냐
여대를 특정한 틀에 가둬선 안 돼
동덕여대 시위를 응원하는 이유

경향신문

지난 14일 서울 성북구 동덕여대 교정에 학교 측의 남녀공학 전환 논의를 규탄하며 학생들이 벗어둔 점퍼가 놓여 있다. 성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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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를 여성화하는 재현은 여성의 정치성을 은폐하는 것과 더불어 ‘결국에는 남자의 연애 대상’으로서 여성을 호명한다. 연세대와 고려대가 경합하는 행사에서 “이대생은 우리 것, 숙대생도 양보 못한다”거나 “이대한테 차이고 숙대한테 차이고”라는 노래가 비교적 최근까지 불렸다. 여자대학교의 여대생을 여성화하는 방식은 동시에 ‘여대가 아닌’ 공학의 여대생을 ‘상대적으로 여성성이 부족한’ 존재로 배치한다. 공학의 여대생은 남성중심적 공간에서 거슬리지 않도록 ‘적당히 남성화’되라는 요구를 받으면서, 또한 연애 대상으로서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는다. 1996년 출간된 권여선의 소설 <푸르른 틈새>에서 주인공은 ‘너무 여자처럼’ 보일까봐 학우들과 함께 간 술집에서 화장실이 열악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태연함을 연기한다. 2008년 엄청난 ‘히트’를 쳤던 KTF SHOW의 광고는 ‘공대 아름이’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여성이 적은 공대에서 ‘아름이’는 그를 MT에 데려가기 위해 학과 남학생들이 이벤트를 할 만큼 추앙받다가 “옆방에 여대 왔대!”라는 소식에 버림받는다. 여대의 여학생과 공학의 여학생을 연애 시장에서 경쟁의 논리로 배치하고, 각각 ‘더 여성적이지만 개념 없음’ ‘덜 여성적이지만 개념 있음’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2015년 9월 한국일보는 <두 정거장 차이인데 패션은 ‘극과 극’>이라는 기사에서 고려대 자연계 캠퍼스와 동덕여대 학생들의 옷차림을 비교했다. 공학, 그것도 자연계열의 여대생은 무채색 옷을 주로 입지만 여대 학생은 알록달록한 원색과 튀는 디자인 옷을 입는다고 분석한 기사가 처음부터 염두에 둔 전제는 뻔하다. 해당 기사는 동의 없이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 ‘몰카 저널리즘’이라고 비판받았다.

남성과 같은 공간에 있을 때, 여대생은 연애 대상으로서 어떤 점수를 받느냐 혹은 어떤 남성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 이런 현실은 큰 인기를 끌며 드라마로도 제작된 웹툰 <내 ID는 강남미인>이나 <치즈 인 더 트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내 ID는 강남미인>의 미래는 ‘천연미인’ 수아와 매번 비교당하고, 고학번 선배는 성형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미래를 ‘쉬운 여자’라고 판단하거나 ‘성형 괴물’이라고 놀린다. <치즈 인 더 트랩>에서 홍설에게 뛰어난 학과 성적이나 성실성보다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은, 과에서 유명한 유정 선배의 조력이다.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배우 수지는 ‘누군가의 첫사랑’으로 등장하며, 선배와 얽히면서 주인공의 세상에서 아웃된다. 드라마 <두 번째 스무살>(tvN)에서 하노라(최지우)는 38세의 나이에 대학에 입학한 늦깎이 새내기이다. 처음에 그는 ‘여대생’이라는 범주에 의문을 제기하는 존재로서 배척당하고 소외된다. 어리지도, 연애 대상도 아닌 그를 보고 당황하는 학우들의 모습에서 여성을 개별 인격체이자 동료로 대하는 경험의 부재를 엿볼 수 있다.

성적으로 평등하지 않은 세계라면 어느 공간이든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미디어가 여성을 묘사하는 타자화와 성애화가 여대와 여대생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듯이. 그래서 안전과 보호의 차원에서 여대의 필요성은 호소력이 있다. 여성 교육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던 시절 설립된 여자대학교의 존재 의의와 여자대학의 맥락 또한 고유하다. 그러나 바깥 세계가 여전히 폭력적이라면, 여대만이 온전한 낙원이자 최후의 보루가 될 순 없다.

여성들이 언제까지나 격리된 채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젠더폭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개별적 인격체이자 정치적 주체로 존재할 권리가 일부 여대의 학생들에게만 허용되는 전설이어서는 안 된다. 여대와 여대생을 특정한 방향으로 형상화하려는 의도에 저항하며, 동덕여대 시위에 응원을 보낸다.

경향신문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참고논문: 김은정·권경미, ‘웹툰에 나타난 불유쾌한 로맨스와 여대생 표상 연구’, <애니메이션연구>, 한국애니메이션학회, 2018.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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