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제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
1987년 민주화와 더불어 제9차 개헌을 통해 ‘87년 체제’라고 부르는 지금의 권력구조가 도입되었다. 87년 체제에서 이미 8명의 대통령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재임 중 국가가 당면한 과제들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무능한 또는 잘못 뽑은 대통령이란 비난을 받았고, 대부분 퇴임 후 감옥에 갔거나, 스스로 목숨을 던졌거나, 탄핵당하였거나, 수사 대상에 올랐다. 예외라 할 수 있는 경우도 아들들이 감옥에 갔다. 우리는 이미 선진국이라 자부하지만 다른 선진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일이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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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실패 중요 요인 중 하나는
국민 기대와 현실 권력 간의 괴리
지속되는 국가 정체 타개 위해선
권력 구조와 국가조직 개편 필수
여러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우리 사회 저변에 깊이 깔린 갈등 요소들과 분쟁적 정치 풍토가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우리 국민이 국가 지도자로서 대통령에 기대하는 것과 대통령이 실제 행사할 수 있는 현실 권력과의 괴리가 있다. 우리 국민은 제왕적 대통령이라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왕처럼 당면 과제들을 척척 힘있게 해결해 내지 못함을 비난한다.
87년 체제의 권력구조는 그 이전 대통령제와는 크게 다르다. 적어도 세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는 5년 단임제다. 대개 첫 1년은 대통령직을 익히는 시기, 마지막 1년은 레임덕 시기라 일할 수 있는 기간은 고작 길어야 2~3년이다. 이 기간에 총선이나 지방선거가 끼게 되어 제대로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어렵다. 이는 대통령 개인의 시계(視界)뿐 아니라 국가 전반의 시계를 단기화했다. 둘째는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다. 87년 체제 이전에는 제도상 여소야대 국회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87년 체제에서 여소야대 상황이 자주 벌어지면서 우리나라 권력구조는 대통령과 의회 권력이 충돌해 국정 정체가 이어지는 ‘이중적 민주주의 정통성(dual democratic legitimacy)’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앓게 되었다.
셋째는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금융 구조조정으로 대기업의 재무구조가 크게 개선되고, 자본시장 개방, 시장 자유화로 정부가 과거처럼 대기업의 사활을 좌지우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금융실명제, 회계투명성 강화 등으로 정경유착의 토양이 마르게 되었다. 대통령은 더 이상 여당 총재로서 당 운영비와 선거자금을 지원하지 못하게 되고 공천에도 간여할 수 없게 되었다. 오랜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끈끈한 동지애로 형성된 양김(兩金) 시대의 가신 정치도 종식되고, 국정원 등 권력기관을 통한 여야의원 압박·회유도 어려워지면서 대통령과 여당과의 관계는 과거와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처럼 정당이 가치와 이념보다 지역과 연고를 기반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해온 나라에서 여당은 대통령과 뜻이 다르거나 선거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탈당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우리가 오늘날 선진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지게 된 것은 과거 우리가 맹목적으로 도입한 서구식 헌법의 정치체제가 우리 상황에 잘 작동되는 최선의 지배구조여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의 대통령들이 자주 헌법의 취지와 달리 편법적·탈법적으로 국가운영을 해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불가능하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보이지 않고 물밑으로 작동하던 과거의 제도가 사라지면 이를 새로이 명문화되고 보이는 제도로 보완해 주든가, 아니면 시민사회의 성숙과 사회적 자본의 축적으로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제도의 발전이 이를 보완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투명화하고 민주화된 정치권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원리다. 그러나 후자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국가의 도전과제들은 심대하고, 지도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국가지배구조로는 국가 정체와 퇴행을 벗어나기 어렵다. 개편해야 한다. 어떻게? 필자의 견해로는 우리 국민이 유럽이나 미국 국민과 다른 역사적 경험, 의식과 관행,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을진대, 이념적·이상적 추구보다 우리의 상황에서 잘 작동할 수 있는 실사구시적 개헌이 필요하다. 우리의 경우 사회적 신뢰에 기반한 민간의 협력과 자율조정기능이 여전히 취약하고, 시장의 윤리와 질서, 공정경쟁이 아직 깊이 정착하지 못했다. 국가의 기능은 서구의 시민사회, 시장경제에서 보다 더 중요하다. 한국의 권력구조는 역사적으로 중앙집중형이었다. 서양이나 일본처럼 분권적 봉건체제 경험은 없다. 조선시대는 TV의 사극에서만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유산은 우리의 의식 속에, 행동 양식에, 오늘의 정치·사회 관행에 여전히 깊이 배어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권력구조와 국가조직 개편을 더 미루어선 안 된다. 4년 혹은 5년 대통령 중임제로, 대통령 권한과 책임을 모두 강화하고, 여소야대 국회가 되었을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협치가 이뤄지는 제도를 제언하고 싶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니 토론하고 모색해보자. 그러나 차기 대통령은 지금의 헌법으로 뽑게 되지 않길 바란다.
조윤제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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