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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에디터의 창]로테와의 ‘극단적 이별’은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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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는 과연 베르테르의 마음을 알아주긴 했을까. 그저 혼자서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흠뻑 빠져들었던” 걸까.

2016년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정원에 괴테상이 세워졌다. 신격호 창업주(1922~2020)가 일본 유학 시절 읽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자전적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를로테에서 회사 이름을 따왔다는 건 널리 알려졌다. 롯데그룹이 지난주 말 즈음해서 또 나돈 ‘유동성 위기설’로 홍역을 치렀다. 이를 롯데월드타워와 연결지어 ‘마천루의 저주’라고 일컫는 이들까지 보인다.

며칠 전 이런 지라시가 롯데를 뒤흔들었다. ‘차입금 29조9000억원으로 그룹 유동성 위기’ ‘직원 50% 이상 감원 예상’ 따위다. 나아가 ‘12월 모라토리엄 선언’ ‘제2 대우그룹 공중분해’까지 갖다붙였다.

롯데는 터무니없다고 펄쩍 뛴다. 급기야 지난 18일 “루머는 사실무근”이라고 공시한 데 이어 21일 롯데그룹은 “총자산 139조원에 즉시 활용 가능한 예금 15조4000억원, 부동산 가치 56조원”이라며 “유동성에 문제없다”고 못 박았다. 진원지인 롯데케미칼의 부채비율도 75%선에 그친다. 앞서 2022년 강원도발 레고랜드 사태 때도 유동성 위기설이 나돌았으나, 롯데는 애써 진화했다.

어쩌다가 최근 롯데는 위기설의 단골이 됐을까. 예로부터 세 명만 그럴듯하게 꾸며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며 삼인성호(三人成虎)라 했다. 비록 풍문이더라도 투자자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건 신뢰 문제다. 이게 위기의 실체다.

크게 보면 신동빈 회장의 숨 가쁜 그룹 몸집 불리기도 불씨를 제공했다. 수년간 롯데는 인수·합병(M&A) 등에 연거푸 지갑을 열었다. 우리홈쇼핑, 바이더웨이, 두산주류, 하이마트 등이 대표적이다. 또 일진머티리얼즈, 한국미니스톱을 사들였고 한샘, 중고나라에 지분투자했다. 문제는 얼마나 성과를 봤느냐다. 어쨌거나 기업가는 실적으로 말하는 외 달리 도리가 없다.

사업에 강약을 두는 지점도 다소 애매하다. 예컨대 빼빼로를 1조원 글로벌 브랜드로 키우겠다는데 좀 의아하다. 차라리 2008년 세계 3대 초콜릿인 길리안까지 인수한 마당에, 코코아 원료 가공사업을 세계 최고급으로 육성하는 게 더 큰 그림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최근 롯데 제품, 서비스 중 인상적인 건 크러시 맥주와 롯데홈쇼핑의 캐릭터 벨리곰 정도다. 나머지는 꼬깔콘만큼 그저 익숙한 것들이다. 엔제리너스나 롯데리아, 하이마트 또한 자신만의 장점이 흐릿해졌다. ‘전통’을 잇는 건 자칫 ‘미래’를 가로막는 일일 수도 있다. ‘혁신의 바퀴’를 굴리지 못한 기업은 끝내 스러져가기 마련이다.

다만 최근 몇몇 투자들은 눈길을 끈다. 특히 일진그룹에서 인수한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2차전지용 동박(얇은 구리막) 제조업체로 세계 2위다. 안타깝게 지금은 캐즘(일시적 수요정체) 속에 고가 매입(2조7000억원) 논란이 따르긴 한다. 또 2022년 미국 BMS사의 시러큐스 공장을 인수해 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사업에 뛰어든 롯데바이오로직스도 눈여겨볼 만하다. 당장은 부담도 되지만, 이런 신동빈호의 방향타 전환은 타당해 보인다.

신 회장도 올해 초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바이오테크놀로지, 메타버스, 수소에너지, 2차전지 소재 등 신성장 영역으로 사업 교체를 이어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과거 매출액으로 ‘아시아 톱10’을 목표로 내걸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 이익이나 고객 만족도를 포함해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더 진작에 추구했어야 할 마땅한 가치다.

그런데 이런 중차대한 얘기를 새해 벽두에 일본 매체를 통해 듣다니 솔직히 기분이 언짢았다. 앞서 ‘일본 기업’ 논란에는 “8개 국내 상장사 매출액이 그룹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 기업”이라던 신 회장이다. 2015년 8월 호텔롯데 상장과 복잡한 순환출자 해소를 약속하고, 형제간 경영권 분쟁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던 자리에서다.

“그녀(로테)의 멋진 말에 매료되어 그녀의 말을 몇 번이나 허투루 들었네….” 로테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베르테르는 극단적 이별을 택하고 말았다. 위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 신뢰 상실에서 비롯되고 증폭되기 일쑤다. 이런 점에서 지금 롯데는 ‘위기’에 가깝다. 그룹 사업 전반에 세탁과 물빼기, 수선이 시급해 보인다. ‘로테’를 연모하는 ‘베르테르’(주주)들과의 이별은 어서 막아야 한다.

경향신문

전병역 경제에디터


전병역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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