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기의 배내옷을 깁는 한강 작가의 2016년 전시 퍼포먼스 영상을 담은 사진. 태어난 직후 세상을 떠난 언니를 떠올리며 글과 퍼포먼스를 준비했던 작가의 내력이 깃들어 있다. 전시 도록에 실린 사진으로 최진혁 사진작가가 촬영했다. 최진혁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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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죽지 마.’
주문을 되뇌며 머리 숙여 배내옷을 깁는다. 달떡 같은 얼굴을 하고 태어났지만, 바로 세상을 떠나버린 언니, 그 언니의 까만 눈을 보고 이렇게 중얼거린 옛적 엄마를 떠올리며 깁는다. 소설가는 글을, 언어를 걷어버리고 말없이 흰 천을 기웠다. 발가락 사이에 목탄 덩어리를 끼우고 종이 위를 위태롭게 걸었다. 손바닥 위에 돌을 올려놓고 씻고, 얼음을 올려놓고 녹는 것을 지켜본다. 자기가 글자를 쓴 종이 위에 흰 깃털을 덮고 가린다. 그렇게 몸으로 걷고 깁고 씻고 가리고 지켜보는 것을 이어나간다. 이 행위들이 영상으로 촬영됐다. ‘배내옷’ ‘걸음’ ‘돌. 소금. 얼음’ ‘밀봉’이란 제목이 차례차례 붙여졌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소설가 한강(54)은 대표작 중 하나인 소설 ‘흰’(2016)을 이 퍼포먼스 영상 전시를 통해 비로소 완성했다. 인간과 삶의 시공간은 슬픔과 아픔을 자아내는 모순의 구조체이며 인생의 현장들은 잔인하고 냉정하기 그지없는 무대임을 시각예술의 언어를 통해 보여주었다. ‘채식주의자’로 영국 부커상을 수상한 뒤 2016년 6월 막 ‘흰’을 출간한 그는 서울 성북구 한옥 주택가 골목길에서 영상작가 차미혜씨와 손잡고 한국 미술판에 남을 문인과 시각예술가의 소통 퍼포먼스 마당을 펼쳐냈다.
배내옷을 깁는 한강 작가의 2016년 전시 퍼포먼스 영상의 세부를 담은 사진. 전시 도록에 실린 것으로, 최진혁 사진작가가 촬영했다. 최진혁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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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제목은 ‘소실.점’. “명명할 수 없지만 우리의 중심에 있는 그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고 소개한 이 전시에서 한강은 4개의 영상 연작을 통해 쓰고 무언의 몸으로 말하려 했다. 그것은 언어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인간 내면 어딘가의 ‘흰’ 부분들, 사실은 하양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부대끼며 빚어내는 온갖 색깔들이 웅크리고 있는 그 ‘흰’의 실체를 드러내려는 의도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곧 세상을 잔혹하게 난장판으로 만든 인간 존재와 역사의 어두운 구석과는 전혀 다른 존재의 존엄과 광명을 머금은 어떤 본질이었다.
흥미로운 건 ‘벤자민의 숲’ ‘경우의 수’ ‘무연의 아침’ 등 영상작품을 낸 차 작가가 한 작가와는 상반되는 구성으로 대구를 이뤘다는 점이었다. 그는 거꾸로 인간의 텍스트와 발성하는 사운드를 자신이 선택한 인간과 사물들 사이의 경계 지점에서 드러내면서 별개의 존재로서 이들이 발언하도록 하는 작품을 냈기 때문이다. 영상 작품 주제가 되는 인물이나 이야기 서사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지점에 텍스트와 사운드를 자리매김시키면서, 인간 아닌 세상의 존재들이 희미하게 혹은 흰 자욱으로 간직한 이미지와 잔상의 소리들을 끄집어내면서 한강의 작품과 절묘한 조응을 이루었다.
2016년 6월 차미혜 작가와 한강 작가의 2인전이 열렸던 서울 성북구 갤러리 오뉴월이주헌의 전시 광경. 도시형 한옥을 개조한 전시 공간 곳곳에 두 작가의 영상과 사진, 설치작품이 놓였다. 김한량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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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일부터 26일까지 조용하게 열린 이 전시는 문단과 미술계 전문가는 물론 일반 관객에게도 멍한 관람을 권하며 소리 소문 없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전시를 기획했던 김정혜 독립 큐레이터는 미술에 관심 없어도 넋 놓고 볼 전시, 보편적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시를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처음 떠오른 작가가 차미혜와 한강이었다고 했다.
“의식하지는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것, 이름 지어 부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기획에서 처음 떠오른 작가가 두 사람이었지요. 사라진 것, 혹은 사라져가는 것, 지워진 것과 남은 것 사이, 그 사이의 감정과 감각을 느리고 더딘 호흡으로 찾아가는 차미혜 작가를 프랑스 유학 후 돌아와 처음 연 전시부터 눈여겨봐왔습니다. 한강 작가 역시 거의 모든 작품을 읽으며 단단하고 치밀한 인간 탐구에 깊은 마음을 갖고 있었고 그의 글에서 보이는 시각적 요소들에 매료돼 있었기에, 두 작가의 작업을 한 공간에 놓아 서로 겹치고 부딪치며 일으키는 울림을 기대하게 됐지요.”
2016년 전시를 앞두고 한강 작가가 친필로 이미지를 그리고 글로 쓴 춤과 퍼포먼스의 동작에 관한 지시문. 음악의 악보나 춤꾼들이 쓰는 무보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김한량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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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가을 무렵, 김 기획자가 차 작가를 먼저 확정한 뒤 한 작가를 만났을 때, 그는 처음엔 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다른 작가를 추천했다. 그러다 마침 진행 중이던 차 작가 전시를 보고는 흔쾌히 마음을 돌려 하겠다고 하면서 2인전 준비가 시작됐다. 김 기획자는 한 작가에게 텍스트가 아닌 다른 언어를 써서 노래나 드로잉, 그림 등을 작업해달라고 요청했다. 한 작가가 그때 작업 중인 글이라면서 보여준 것이 소설 ‘흰’이었다.
해를 넘겨 거의 7~8개월간 서로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흰’ 초판에는 차 작가가 사진작가로 참여했다. 전시와 출판 시기도 비슷했고, 한강의 부커상 수상이란 경사도 있었지만, 둘은 초심대로 전시에만 집중했다. 인간 바닥의 감정까지 치밀하게 파고들어간 한 작가의 몸 작업 영상들과, 기억과 상상의 파편들을 독특한 감각으로 배치한 차 작가의 자연과 사물의 영상들은 조용한 울림을 던졌다. 인간과 세계의 ‘흰’ 구석이 전하는, 보이지 않는 떨림을 담은 그들의 작업은 한국 미술판에서 사실상 묻힌 사람과 사물의 관계와 본질에 대한 진정한 소통과 공유의 기억을 일깨워준 희귀한 사례로 남았다.
2016년 한강 작가와의 2인전 당시 선보였던 차미혜 작가의 사진 연작 ‘가로와 거리’의 한 작품. 차미혜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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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시를 본 평론가 방혜진의 평문 마지막 대목은 이들의 작업 의미에 대한 정확한 헌사라 할 만하다.
‘침묵하지만 끈질기게 존재를 드러내는 사물의 소리는 한강의 퍼포먼스와 차미혜의 영상을 수렴시키는 ‘소실점’이 된다. 이야기가 사라지는 가운데 사물이, 영상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낸다. 영상과 영상이, 사물과 사물이 관계 맺으며 흘러간다. 한없이 멀리 존재하는 원점을 향해 소실되어가는 것들의 연루를 통해, 지금껏 읽거나 보거나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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