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올해 수능은 총 52만2670명이 지원했는데, 그중 'N수생'이 16만1784명으로 2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N수생의 급증은 의대생 정원 확대의 영향이 가장 크지만, 이면엔 청년 취업난과 그에 따른 명문대 선호 현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학 이름이란 고등교육기관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앞으로의 인생에 매겨지는 등급이 대학 이름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부터 등급이 떨어지면, 패자부활전 따위는 쉽지 않다. 그래서 한참 도전하고 실패하며, 모든 경험이 자산이 되어야 하는 시기에 청년들은 부모들의 노후자산을 헐어, 시험을 보고 또 본다.
대학에 들어가도 다르지 않다. 노동 시장의 이중 구조가 공고한 한국 사회에서 하부시장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면 상부시장으로 영원히 진입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하다. 그럴 바에는 오래 취업준비생으로 머무르는 것이 낫다. 지난 19일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 청년층(15~29세) 중 3년 이상 취업하지 않는 청년이 역대 최고였다는 수치를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티처스'라는 한 TV 프로그램에 야구선수를 꿈꾸던 학생이 출연했다. 어깨 부상으로 야구선수를 못 하게 되자, 좌절을 딛고 '프로야구 전력분석원'이 되겠다는 꿈을 다시 가지고 공부를 시작한 학생이었다. 야구에 대한 열정도 의지도 어느 하나 밀릴 것이 없지만 문제는 수능이 고작 1년 남았다는 것이었다. 이 학생이 1년 안에 상부시장의 직업을 갖기 위한 '등급'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필자의 아이도 야구선수를 꿈꾸고 있다. 아직 어리기에 추신수 같은 야구선수가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야구와 상관없는 수학을 공부하라고 하자 반발했다. 혹시 야구를 그만뒀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라는 엄마의 옹색한 변명에 아이는 그럼 '그때' 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동그란 눈을 마주하자 '그때는 너무 늦을지도 몰라'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너무 늦은 것 아닐까요?"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너무도 잘 키우고 싶은 소중한 아이가 행여 나의 무지와 부족으로 적절한 시기를 놓치는 것이 아닐까 부모는 늘 두렵다. 그러기에 사교육 시장의 광기를 알면서도 내려놓지 못한다. 너무 늦어서 아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까 봐. 내가 늦어서 아이를 힘들게 할까 봐 말이다. 진료실에서 필자는 자신 있게 말한다. "너무 늦은 것은 없습니다. 서울로 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듯, 치료 방법이 달라질 뿐이죠"라고 말이다. 그런데 내 아이의 동그란 눈앞에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 아이들의 강점은 다 다르고, 그 강점이 꽃피는 시기 역시 모두 다 다른 것을 알면서도, 과연 우리 사회가 그 강점이 꽃피는 시간을 기다려줄 수 있는지 확신이 없기에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올해 '수능 필적 확인 문구'는 곽의영 시인의 시에서 인용된 '저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쳐라'였다. 과연 우리는 아이들이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칠 수 있게 하고 있을까. 불안을 대물림하기 싫어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청년들에게 실패해도 괜찮다고, 또 다른 길이 있으니 마음껏 큰 꿈을 펼치라고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있을까. 성공의 길이 하나뿐인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에서 도전은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다. 다양한 길이 있어야 한다. 획일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고유한 여정을 인정하고 지지할 때, 우리 아이들이 비로소 시험장이 아닌 진짜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너무 늦은 것은 없다고 진료실에서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길 바란다.
[박소연 서울아산병원 교수·'강점으로 키워라' 저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