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논설위원 |
시청률 16.5%의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한 드라마 ‘정년이’ 덕에 여성국극 재조명 바람이 뜨겁다. 국가유산진흥원이 다음달 3일 서울 강남구 국가무형유산 전수교육관에서 공연하는 여성국극 ‘선화공주’는 일찌감치 티켓이 동나 2회 추가 공연까지 하게 됐다. 팔순, 구순을 넘긴 1, 2세대 국극배우들을 중심으로 여성국극의 국가무형유산 지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시대를 대표한 문화유산인 만큼 소멸을 막기 위해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2022년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인기에 힘입어 그해 10월 대한민국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남 창원 동부마을 ‘팽나무’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드라마 ‘정년이’. 여성이 연기하는 남역(오른쪽)은 여성국극 인기의 견인차였다. tv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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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대중화 기여” 지정 요구
“한때 유행 장르” 반대의견도
실험정신·유연성이 핵심 가치
전통 재현·복제 머물러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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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 남장 배우에 아이돌급 팬덤
드라마 ‘정년이’가 재현해낸 여성국극 무대는 근사했다. 심금을 울리는 창(唱)과 춤·연기, 화려한 무대 장치와 분장·의상이 어우러져 이런 예술 장르가 있었는지도 몰랐던 젊은 세대까지 매료시켰다. 하지만 여성국극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국악 대중화에 기여했다. 문화재(국가유산) 지정이 되는 건 시간 문제”라는 긍정론에서부터 “여성국극만 따로 떼어놓을 순 없다. 창극과 함께 지정돼야 한다”는 절충론, “한때 유행한 대중문화의 한 장르였을 뿐, 이미 명맥이 끊겼다”란 비판론까지 찬반 스펙트럼이 넓다.
여성국극은 판소리를 근간으로 하는 무대예술이다. 여성만 출연해 남장 연기를 펼친다는 것이 창극과의 차별점이다. 1948년 판소리 명창 박록주(1905∼1979)가 만든 여성국악동호회에서 출발했다.
여성국극은 195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 전까지 국악 공연은 나이 많은 판소리 명창 중심의 무대였다. 여성국극의 여성 배우들이 연기하는 ‘꽃미남’ 캐릭터는 21세기 아이돌 같은 팬덤을 만들어냈다. 판소리 다섯 바탕에 매여있던 창극과 달리 여성국극은 설화와 역사에 뿌리를 둔 창작극부터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를 번안한 ‘햇님과 달님’, ‘로미오와 줄리엣’ 번안극 ‘청실홍실’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여성 배우가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세계 공연사에 유례없는 일은 아니다. 서양 오페라의 ‘바지 역할(트라베스티)’가 그렇고, 일본의 다카라즈카, 중국의 월극이 그렇다. 하지만 우리의 여성국극처럼 짧은 전성기를 누리고 나서 쇠락해버린 경우는 흔치 않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의 케루비노는 여전히 바지 역할의 몫이고, 다카라즈카는 일본 공연계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월극은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했다.
남역배우 임춘앵(왼쪽에서 두 번째)이 여성국극 ‘귀향가’에서 남장 연기를 하고 있다. 여성국극제작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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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국극 쇠퇴의 가장 큰 요인으로는 1960년대 이후 대중화된 TV와 영화 등 문화 환경의 변화가 꼽히지만, 내부의 한계도 분명 있었다.
무엇보다 남역배우로 이름을 날린 임춘앵(1923∼1975)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가 컸다. 그가 개인사와 건강 등의 이유로 스타성을 잃으면서 여성국극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스타를 계속 만들어내는 교육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 단위의 수공업적 생산체제로 극단을 운영하며 장기적인 안목과 계획을 갖지 못했던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상업적 성공 이후 돈벌이를 좇아 단체가 난립하면서 공연의 질도 점차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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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본질 흐린 저질 통속 취급받아
여성국극의 전성기가 한국전쟁 여파로 문화계에서 남성들의 활동이 약화됐던 시기였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1950년대 중반 이후 국악계는 다시 남성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됐다. 1962년 국립창극단의 전신인 국립국극단이 혼성으로 창단된 것은 여성국극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정타였다. 창극의 전통 회복이 시대적 당위로 떠오르며 여성국극은 판소리의 본질을 흐린 저질 통속 예술 취급을 받기에 이른다. 여성국극은 결국 ‘유리천장’을 넘지 못한 채 꺾이고 만 것이다.
드라마 ‘정년이’의 원작은 2019∼2022년 연재됐던 동명의 웹툰이다. K컬처의 신동력으로 꼽히는 웹툰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여성국극을 다시 대중 앞에 끄집어냈다는 건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여성국극의 가치는 전통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다양하게 변주해낸 실험정신과 유연성에 있다. 화려했던 과거의 재현이나 복제에 머무르면 그 의미가 희석된다. 여성국극의 영속성을 찾는 방법이 국가문화유산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좀더 숙고가 필요하다. 드라마 인기에 떠밀려 할 일은 더욱 아니다.
이지영 논설위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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