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현지시간) 뉴질랜드 연립정부가 와이탕이 조약을 재해석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하자 마오리족을 포함한 원주민 공동체가 오클랜드에서 항의 시위를 열고 있다. 게티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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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 원주민 권리 보장을 명시한 건국 조약을 손보겠다는 내용을 담은 법안이 발의돼 시민 반발이 커지고 있다. 법안이 의회 문턱을 넘을 가능성은 낮지만, 이를 주도한 보수 정당들의 ‘원주민 차별’ 정치가 본격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마오리족 깃발 들고…최대 규모 ‘평화 행진’
19일(현지시간) 뉴질랜드헤럴드와 BBC 등에 따르면 이날 뉴질랜드 수도 웰링턴에서는 마오리족 등 원주민 수만명이 “법안을 폐기하라”고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이들은 마오리족 자주권을 상징하는 빨강, 하양, 검정 깃발을 들었고, 일부는 전통 의상과 머리 장식을 착용했다.
19일(현지시간) 뉴질랜드 웰링턴 의회 앞에서 마오리족 원주민들이 와이탕이 조약을 재해석하는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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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는 9일 전부터 뉴질랜드 북섬에서 수백㎞를 걷는 ‘하코이(평화 행진)’를 시작해 이날 의회 앞에 도착했다. 수백명 규모로 시작했지만, 원주민 공동체를 지지하는 다른 시민들도 합류하면서 4만2000명(경찰 추산)으로 늘었다. 이는 원주민 공동체가 일으킨 시위 중 최대 규모라고 현지 매체는 전했다.
마오리족과 스웨덴 혈통인 스탠 링먼은 “법안이 우리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며 “행진은 모든 뉴질랜드인을 위한 것”이라고 BBC에 말했다.
마오리족은 왜 거리로 나왔나
앞서 보수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뉴질랜드행동당은 지난 7일 원주민 권리 보장을 명시한 ‘와이탕이 조약’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와이탕이 조약은 1840년 뉴질랜드를 통치하던 영국 왕실과 원주민 마오리족 500여명이 맺은 조약이다. 여기엔 마오리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고, 원주민의 토지와 문화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건국 조약’처럼 여겨졌고, 이후 원주민 정체성 보존을 위해 제정된 여러 법률을 마련하는 기틀이 됐다.
이에 뉴질랜드는 원주민을 지키는 데 적극적인 나라로 평가받았다. 오늘날 마오리족은 뉴질랜드 인구의 약 16%를 차지한다.
19일(현지시간)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마오리족 원주민들이 와이탕이 조약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새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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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난해 보수 연립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정부는 공공 서비스에서 마오리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원주민 정체성을 훼손하는 정책을 여러 차례 추진해왔다.
뉴질랜드행동당은 해당 조약이 마오리족에만 특혜를 주고 ‘역차별’을 조장한다며 이를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약 자체를 뒤엎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마오리족의 권리 보장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법안 1차 표결이 진행된 지난 14일에는 마오리족 출신인 하나라위티 마이피클라크 의원이 법안 사본을 찢고 마오리족 전사들의 의식인 ‘하카’를 하며 항의하기도 했다. 당시 의회 내 소란이 담긴 영상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퍼지면서 화제가 됐다. 2차 표결은 약 6개월 뒤에 열릴 예정이다.
지난 14일(현지시간) 하나-라위티 마이퍼-클라크 의원이 법안 1차 표결을 앞두고 의회에서 마오리족 전통의식인 ‘하카’를 하며 항의하고 있다. 엑스 갈무리 |
보수 정당, ‘원주민 갈라치기’ 시동거나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낮다. 야당은 물론 연정에 참여하는 다른 정당들도 모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연정을 이끄는 크리스토퍼 럭슨 총리(국민당)도 “펜 하나로 184년 약속을 다시 쓸 수는 없다”고 만류하는 상황이다.
다만 앞으로 보수 정부의 ‘갈라치기’가 본격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원주민 보호정책을 연구하는 뉴질랜드 법학자 카윈 존스는 “조약을 재해석하면 마오리족이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는 법적 공간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며 보수당의 입법 시도 자체가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다른 시민들의 반감을 부추길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날 웰링턴에서 시위를 지켜보던 주민 바버라 르콤테는 BBC에 “마오리족이 점점 더 많은 걸 요구하는 것 같다”며 “뉴질랜드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있고, 이들 모두가 똑같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최혜린 기자 cher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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