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1973년 14.8% 등 1970년대 다섯 해 성장률이 10%를 웃돌았다. 1980년대에도 10% 이상이 네 차례였고, 마지막 두 자릿수 성장률은 1999년이었다. 1971년부터 20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9%대였다. 이후 한국은 1990년대 6%대, 2000년대 4%대, 2010년대 2%대로 성장률이 계속 떨어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 성장률은 2%대에 고착화할 가능성이 크다. 5분의 1 수준이니 공부 잘하던 학생이 바닥권 성적표를 받았다고 누군가 꾸지람할지도 모른다. 가장 큰 걱정은 성장률 하락으로 취약계층이 받게 될 타격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후반기에는 소득·교육 불균형 등 양극화를 타개하기 위한 전향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말인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감세와 재정긴축에 매달리는 정부가 양극화 타개에 나설 수 있을까.
지금도 성장률 고공행진을 하는 나라들이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의 배경국가인 수리남과 이웃한 중남미 가이아나는 지난해 성장률이 43.8%였다. 2019년 원유 생산을 시작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가 됐다. 지난해 아시아 마카오(10.6%), 아프리카 니제르(9.9%), 남태평양 사모아(9.7%) 등도 1980~1990년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원래 농업국가였던 가이아나와 니제르는 갑자기 유전이 발견돼 원유를 생산하면서 고성장 가도에 올랐다. 원유 생산 전 성장률은 3% 안팎이었다. 마카오와 사모아는 해외 관광객 유치로 경제가 굴러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2020년부터 극심한 마이너스 성장을 겪은 뒤 지난해 관광객이 몰려들어 성장률이 급등했다. 마카오의 2020년 성장률은 -54%였고, 사모아는 2021년 -7.1%였다.
성장률이 높아졌다는 것은 전년보다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는 뜻이다. 일자리와 소득도 더불어 증가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고성장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고성장하면 시민 전체가 행복해진다는 전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의 1970~1980년대 고성장의 배경에는 노동 탄압과 인권 유린, 양극화 심화 등의 그림자가 있다.
유엔 산하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는 해마다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한다. 2024년 한국의 순위는 143개국 중 52위였다. 반면 지난해 성장률이 높았던 10개국 중 가이아나, 마카오, 사모아 등 절반은 아예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그나마 조사 대상이었던 고성장 국가의 성장률 및 행복지수 순위를 보면 니제르 3위-109위, 조지아 6위(7.6%)-91위, 인도 7위(7.0%)-126위, 타지키스탄 9위(6.8%)-88위, 베냉 10위(6.5%)-119위 등이었다.
한국 경제가 2%대 또는 그보다 아래의 저성장이 예상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1970년 100만명이 넘었던 출생아 수는 지난해 23만명으로, 합계출산율은 4.53명에서 0.72명으로 급감했다. 생산에 투입할 노동력이 갈수록 줄어든다. 수십년째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과 산업구조 개편을 외쳤음에도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국내 시장이 좁은 한국은 수출을 늘려야 하는데 보호무역 기조가 강해져 그마저도 쉽지 않다.
저출생과 저성장은 확실한 미래지만, 고성장은 불확실하다. 대량으로 생산·유통·소비·폐기하는 성장 시스템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현실을 외면한 채 집단 최면에 걸린 듯 ‘성장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여기지 말자. 코로나 팬데믹 때 경제활동을 일시 중단하자 벌어졌던 일들을 기억한다. 지구는 잠깐이나마 맑은 하늘과 깨끗한 바다를 선사했다.
저성장을 지나 제로, 후퇴의 단계로 갈 수도 있다. 후퇴한다고 해서 나라와 기업이 망하는 건 아니다. 과잉이 사라지는 상태이다. 보다 적은 생산량으로 다수가 만족하면서 살 수 있다면 지구와 인류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오래된 관행인 성장 위주 전략을 재검토할 시기가 됐다. 성장률을 높이지 않고도 시민 모두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플랜B, 플랜C가 필요하다.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haho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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