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추가 혐의까지 입증한 건 '일관된 진술'
"대체입법 4년째 방치, 정부·국회 서둘러야"
임신 36주 차에 임신중지(낙태) 수술을 받았다고 주장한 한 유튜버가 촬영한 자신의 복부 초음파 사진. 유튜브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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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산 상태로 산모 밖으로 나와 법률상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다는 판단이 생각보다 일찍 내려졌죠.”
신기용 변호사 (2019년 '34주 낙태 사건' 담당 검사)
올해 6월, 임신 36주 차의 한 여성이 태아를 임신중지(낙태)한 뒤 이를 브이로그(일상 영상)에 담아 유튜브에 게시한 사건이 벌어졌다. 논란이 커지자 보건복지부 의뢰로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정부는 수사 의뢰에 앞서 2019년 3월 벌어진 이른바 '34주 낙태 사건'을 판례로 삼았다. 서울의 한 산부인과 전문의 윤씨가 임신 34주의 임신부에게 낙태 시술을 한 사건이다. 당시 사건을 주목해야 하는 건 시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여러 정황 증거를 통해 아기가 살아 있는 상태로 산모 밖으로 나왔다는 걸 증명해 유죄 판결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수술실과 병원 폐쇄회로(CC)TV가 없는 데다 태아 시신도 이미 화장돼 혐의 입증이 매우 까다로운 이번 '36주 낙태 브이로그 사건'에 시사하는 바가 적잖은 것이다. 5년 전 서울중앙지검에서 수사와 기소를 맡아 유죄 판결을 끌어낸 신기용 변호사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관계자 진술이 얼마나 촘촘하게 확보돼 있느냐가 관건일 것"이라는 말로 이번 사건에 대한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놨다.
반복된 만삭 낙태, 혐의 입증 가능한가
17일 본보가 확인한 '34주 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산부인과 전문의 윤씨는 몸에서 꺼내고도 살아있는 태아를 양동이에 받은 물에 담가 살해했다. 사체는 수술실 냉장고에 넣어 냉동시킨 뒤, 의료폐기물 수거업체에 넘겼고 나중에 소각됐다. 윤씨 등은 경찰 수사에 대비해 이미 사산한 태아를 꺼내는 수술을 한 것처럼 진료기록부를 조작하기도 했다. 윤씨는 2021년 살인 등 혐의로 징역 3년6개월을 확정 받았다.
임신 36주에 임신중지 수술을 받은 후기를 유튜브에 올려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20대 여성의 임신 중 모습. 해당 유튜브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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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7년 차 검사였던 신 변호사에게 수사는 쉽지 않았다. 현행 민법은 태아가 산모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시점부터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분만 후 범행'이 발생했음을 증명해야 했다. 신 변호사는 "(사망한 아기가) 태아와 사람의 경계에 있어 판단이 어려웠고 참고할 만한 유사 사건이 전무해 힘들었다"고 돌아봤다.
'태아 시신'이라는 직접 증거가 없어 다수의 정황 증거를 통한 사실 관계 확립이 중요했다. 신 변호사와 수사팀은 △'태아에게 특이점은 없었다'는 다른 산부인과들의 소견 △출산 전 초음파 기록지 △'통상 태아 생존율은 34~36주 차의 경우 99%를 보인다'는 자문 의견 △'아이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는 산모 모친의 진술 등을 법원에 제출했다. △산모의 초진접수카드 △산모가 직접 작성한 산부인과 문진표까지 증거로 활용됐다.
특히 수술에 참여한 의료진들의 '일관된 진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취의와 간호조무사들은 '모체 밖으로 나온 아이의 움직임과 우는 소리를 들었다' '탯줄을 자른 직후 (윤씨가) 아이를 준비한 양동이에 넣고 45분을 방치했다'고 진술했다. 이런 진술이 먼저 확보돼 '아이가 체내에서 사산됐다'는 허위 의료 기록 등도 순차적으로 밝혀낼 수 있었다. 신 변호사는 "관련자들이 사건 은폐를 위해 모의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사실에 입각해 진술해 (유죄 입증이) 가능했던 일로 기억한다"고 설명했다.
의료진 진술은 이번 '36주 사건'에도 주요 증거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수술실과 병원 폐쇄회로(CC)TV가 없는 데다 5년 전과 마찬가지로 태아 시신이 화장돼 혐의 입증이 쉽지 않아서다. 다만, 이번 사건의 경우 입건된 의료진 6명(병원장·수술을 집도한 타 병원 소속 산부인과 전문의· 마취의·간호사·간호조무사 등)은 아기가 태어난 후 상황에 대해선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다만 수사를 맡은 서울경찰청 형사기동대에 따르면 의료진들로부터 '살아서 분만한 태아에 필요한 의료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진술은 확보한 것으로 파악됐다.
"입법 공백 해소 서둘러야"
‘임신중단 합법화’ 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비웨이브(BWAVE)가 2018년 6월 10일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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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도 큰 충격을 받았던 사건"이라 회상한 신 변호사는 유사 사건이 또 발생했다는 점을 안타까워 하며 낙태죄 대체 입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헌법재판소는 '34주 사건' 약 3주 뒤인 2019년 4월 형법상 낙태죄와 업무상촉탁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대체 입법을 주문했는데 정부와 국회는 아직도 입법을 하지 않고 있다. 검찰은 당시 윤씨를 기소하며 살인 혐의 외에 업무상촉탁낙태 혐의도 적용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살인만 유죄로 인정하고 업무상촉탁낙태는 최종 무죄로 판단했다. '36주 사건' 역시 살인 혐의가 인정되지 않으면 의료진이 강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은 낮아진다.
결국 4년째 이어진 입법 공백이 만삭에 가까운 데도 낙태를 시도하는 극단적인 범행과 무관치 않다는 게 신 변호사 진단이다. 그는 "입법 공백 상황에선 태아 주수가 어떻든 낙태 수술을 해보겠다는 의사가 생기고, 두 사건처럼 만삭 직전의 상황에서도 이를 시도하는 경우까지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경각심을 심어주려면 대체 입법이 서둘러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이유진 기자 iyz@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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