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청사 앞으로 한 시민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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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 증인은 본인이 가진 지식을 바탕으로 ‘이 자료’를 만들 수 없나요?”
“세세하게는 불가능합니다.”
“머리가 좋으면 외울 수 있지 않나요?”
“언제든 찾아볼 수 있는 자료라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실례지만 증인, IQ가 몇이나 되시죠?”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부장판사 지귀연) 심리로 열린 증인신문 현장입니다. 여기서 질문자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기술을 해외로 유출한 혐의를 받는 김모 씨 측 변호인. 답변자는 증인으로 출석한 13년 차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직원입니다.
이날 양측은 유출이 의심되는 자료가 ‘기억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에 대해 다퉜습니다. 재판 내내 “보편적인 지식에 의존해 복원한 자료”라 주장하는 피고인 김 씨. 그는 어쩌다 이 법정에 서게 됐을까요?
저희가 확인한 공소장에 따르면 검찰이 본 상황은 이랬습니다.
●중국으로 간 엔지니어의 큰 그림
20년 넘게 삼성전자에서 근무했던 김 씨. 2015년 7월 그는 삼성전자에서 나와 이듬해 7월 중국으로 향합니다. 중국 허페이시의 반도체 제조업체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에서 D램 개발을 총괄하게 된 겁니다. 이른바 ‘허페이 프로젝트’를 계획한 김 씨의 다음 스텝은 ‘인재 영입’이었습니다. 전 직장이었던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8대 공정을 담당했던 엔지니어들이 그 대상이었죠.
당시 중국에 있던 김 씨가 삼성전자의 기술을 손에 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삼성전자에는 D램을 생산할 때 거치는 618개 단계의 공정 순서와 각 공정별 주요 조건들을 정리한 ‘PRP 자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료를 본 한 삼성전자 직원이 있었습니다. 이 직원은 무단으로 자료 내용을 노트에 옮겼고, 그 노트를 찢어 사업장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찢어진 노트를 촬영한 사진본을 김 씨에게 전송했죠.
김 씨는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된 정보임을 알고도, 이 사진본을 이용해 CXMT의 ‘8대 공정별 정리’라는 파일을 만들었습니다. 이 외에도 한 삼성전자 직원이 D램 공정 세부정보가 담긴 모니터 화면을 무단으로 촬영하면, 이를 건네받는 식으로 삼성전자의 기술을 취득해왔습니다.
그리고 CXMT에서 퇴사한 지 약 2년이 흐른 2022년 9월. 김 씨는 이 모든 자료를 백업 매체에 업로드했습니다. 당시 김 씨는 한 중국 회사로부터 투자를 받아 반도체 장비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요. 검찰은 김 씨가 해당 프로젝트에 이 자료들이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업로드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배타적 기술 VS 일반적 기술
검찰은 이 사건 기술 유출로 인해 중국 CXMT가 급성장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CXMT는 현재 중국 유일의 D램 생산업체입니다. 그간 D램 개발에 나서지 못했던 중국 기업이 삼성전자의 정보를 취득해 기술 장벽을 뛰어넘었다고 보는 것이죠.
삼성전자 측은 D램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해 4년간 1조 6000억 원 이상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검찰은 “D램 공정을 구현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PRP 자료’를 취득할 경우 삼성전자가 그간 쌓아온 개발 성과를 단숨에 취득 가능하다”며 “취득한 자가 중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는 중국 회사라면 그 여파는 더욱 심각하다”고 설명합니다.
지난기일 출석한 증인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이날 증인으로는 삼성전자 반도체 팀에서 약 30년간 근무한 A 씨가 출석했는데요. A 씨는 “PRP를 확보하면 D램 개발의 50%가 완성된 것”이라며 본인 판단으로는 삼성전자의 PRP 자료가 CXMT의 것과 98.5% 일치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 씨는 회사마다 PRP 자료에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로 반박합니다. 김 씨 측은 “CXMT의 ‘8대 공정별 정리’ 자료는 20년 이상 관련 분야에서 근무한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일반적인 내용”이라고 말했습니다. 해당 분야 전문가라면 삼성전자의 원본을 보지 않더라도 작성할 수 있는 수준의 자료라는 뜻이죠.
●“나는 단순 공장직 엔지니어”
김 씨의 입장에서 본 이 사건은 검찰 측 시각과 사뭇 다릅니다. 김 씨는 “나는 공소장에 적힌 범죄행위를 기획할 만한 핵심인력이 아니다”라며 혐의를 부인합니다.
그는 이런 주장을 구체화하기 위해 2010년대 한·중 반도체 업계 사정을 설명하기도 했는데요.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총 3차례 진행됐다는 반도체 업계의 치킨게임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2010년대 3차 치킨게임이 끝난 뒤 전 세계 반도체 기술자들의 대이동이 있었다.’
‘당시 중국은 정부 주도하에 반도체 기업을 설립하고 밀려난 해외 기술진들을 대거 흡수하는 등 D램 반도체 시장을 키워갔다.’
김 씨에 따르면 ‘3차 치킨게임’ 이후 한국 기업들 또한 구조조정에 나섰고, 삼성전자는 2015년 이를 단행했다고 합니다. 당시 김 씨는 사내 감사를 거친 후 퇴직 권고를 받았는데요. 이에 대해 그는 “나는 가장 보편화된 기술 분야의 인력이라 사실상 해고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실업자로 산 지 1년.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지인의 소개로 김 씨는 2016년 중국 CXMT에 입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김 씨는 기술유출에 민감해하던 삼성전자 측에 2018년 자진해 자신의 전직을 알렸지만, 돌아온 답은 ‘당신은 일반 기술자가 아니냐’ ‘실력도 능력도 없으니 일해도 된다’ 였다고 하죠.
즉, 자신은 자타공인 D램 기술 자료를 빼돌릴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전 세계 기술자들의 대이동 기류에 맞춰 중국으로 간 것일 뿐이고, 중국 또한 그즈음부터 D램 개발에 힘써왔다는 주장이지요.
중국으로 간 삼성전자 엔지니어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재판부는 해당 자료들이 산업기술이나 영업비밀로 볼 수 있는지 등을 따질 것으로 보입니다. 삼성전자 기술유출 사건 재판은 다음달 12일 이어집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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