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트럼프 2기 행정부와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하는 경우에도 불리한 계약서에 서명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두 회사의 내부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 역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대응책을 강구하며 미국 내 한국 기업의 투자 현황과 기여도 등을 강력하게 주장, 보조금 축소, 관세 인하 등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미국 펜실베니아주 라트로브에서 열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집회에서 안전모를 쓰고 무대에 올라 있다./로이터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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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스트 시나리오’는 바이든 임기 내 서명
바이든 행정부에서 추진해 온 반도체법의 보조금은 기업들의 투자가 이뤄진 이후 단계별로 집행된다. 바이든 정부의 보조금 지원 집행 과정은 우선 기업들과 예비 양해각서(PMT)를 작성한 뒤, 실사 등을 거쳐 최종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이 순서다. 최종 계약서에 사인을 했더라도 실제 보조금 집행은 상무부와 개별 업체 간 협약에서 설정한 지표에 도달한 경우 이뤄진다.
현재까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 상무부와 예비 양해각서까지 체결한 상태다. 삼성전자의 경우 이미 일정 금액의 투자가 집행됐지만, 최종적으로 미 정부로부터 받은 보조금은 아직 없다. 현재 미 상무부가 현장 실사 등을 거치면서 이들 기업과 세부 지표 등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선 바이든 임기 내에 반도체법 최종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이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방안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최종 계약서를 바이든 행정부와 맺지 않으면 집행 조건 지표 자체를 트럼프 행정부와 다시 협상해야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혁중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북미경제전문연구원은 “기업들이 최종 사인을 완료하면 계약 내용에 따라 보조금 지급 지표를 지켰을 경우 미국 정부가 이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게 된다”며 “만약 지표를 충족했는데도 지급이 이뤄지지 않을 땐 미 정부가 어떤 절차를 따라 어떻게 보상할지에 대한 방안도 모두 최종 계약서에 담기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도 사인한 계약서의 세부 지표를 건드리긴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종 계약을 미루면 미룰수록 보조금 지급 조건은 더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회준 카이스트 인공지능반도체대학원장은 “현재 바이든 행정부에서 대만 TSMC와 임기 내에 보조금 지급 협의를 마무리 짓기 위한 움직임이 있는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이런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며 “TSMC와 지급 협의가 이뤄진다면, 한국 기업도 협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 트럼프와 협상 테이블 앉으면 불확실성↑… 韓 아킬레스건은 ‘VEU’
한국 기업들이 바이든 임기 내에 반도체 보조금 최종 계약서에 사인을 못하고 트럼프 행정부로 넘어갈 경우, 트럼프는 반도체법 조건을 더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보조금, 관세 이외에도 반도체법 가드레일 조항의 중국 관련 제재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 반입 규정이 더 까다롭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미 정부가 잡고 있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아킬레스건’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공장,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에 D램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전체 낸드 생산량의 약 20%, SK하이닉스는 전체 D램 생산량의 약 40%를 해당 공장에 의존하고 있다. 앞서 바이든 행정부는 두 기업에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자격을 부여했다. VEU는 사전에 승인한 기업에만 지정된 품목의 수출 및 반입을 허용하는 포괄적 허가 제도로, 두 기업은 이를 통해 중국 공장 설비를 제한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향후 바이든 행정부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에 부여한 VEU 자격을 취소할 경우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엔 적잖은 부담이 된다. 김 연구원은 “트럼프는 반도체법 내 중국 기업과의 기술 협력 조항이나 중국 공장 내 반도체 생산능력 관련 제한 조항을 더 촘촘하게 만들 것”이라며 “이 경우 중국에 공장을 두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선 더 어려운 조건을 맞이하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다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경영진 역시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가 지속된 이후 중국 공장의 리스크를 인식해 왔다. 이에 따른 대비책을 꾸준히 강구해왔다는 얘기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한때 중국 시안 공장은 중요 생산 거점 중 하나였지만 지정학적 리스크가 파악된 이후 지속적으로 비중을 줄여왔다”며 “한때 절반 수준에 달했던 생산 비중은 20%로 떨어졌고 앞으로는 10%나 한 자릿수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법과 별개로 트럼프 행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에 관세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보조금 축소 여부나 보조금을 두고 가하는 압박과 별개로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관세를 일방적으로 통보할 가능성이 높다”며 “트럼프의 성향상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하고, 관세를 빌미로 세제 혜택을 받고 싶다면 투자 확대 등 자국에 이익이 되는 행위를 하도록 기업을 압박할 것”이라고 말했다.
◇ “트럼프도 무작정 때리기는 힘들어, 韓 정부도 강경 대응해야”
트럼프 행정부가 입버릇처럼 언급하는 관세 부과는 양날의 칼이다. 특히 세계 D램 점유율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대한 관세 부과는 제품 가격 인상으로 이어져 미국 기업도 피해를 볼 우려가 있는 만큼 반도체에 대한 관세 부과를 무작정 바로 시행하지는 않을 것이란 의견이 우세하다.
김혁중 연구원은 “관세 부과는 행정명령만으로도 충분히 시행할 수 있으나, 문제는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짓고 있는 미국 빅테크 기업들도 반도체 가격이 인상으로 비용이 상승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며 “관세 부과를 바로 시행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정부와 기업은 이 시기를 잘 활용해 트럼프 행정부와 협상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보조금 지급을 축소하거나 관세를 부과할 경우 기업들은 우리 정부와 함께 대미 투자 효과를 미국 측에 자세히 알리는 동시에 한국 기업들도 투자를 축소할 수 있다는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김 연구원은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대만 다음으로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는 점을 비롯해 미국 일자리와 부가가치 창출에 상당 부분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정부와 함께 적극 어필해야 한다”며 “관세를 부과하는 순간 미국 현지 공장 운영에도 차질이 생기니 미국을 위해서라도 국내 기업엔 보편 관세를 최대한 덜 부과하는 게 이득이라는 방향으로 설득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유회준 원장도 “삼성전자 입장에서도 사업에 손해를 보면서 투자를 지속할 이유는 없다”며 “미국 정부에서 과도한 요구를 할 경우에는 ‘우리도 이행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해야 한다. 결국 주정부에게는 삼성 파운드리의 성공적인 시설 투자와 고용 창출 등이 절실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선 도움이 필요하다는 식의 요청도 거리낌 없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민규 기자(durchman@chosunbiz.com);최지희 기자(hee@chosunbiz.com);전병수 기자(outstanding@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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