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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JP 모건, 美 중앙은행 씨앗 뿌린 ‘은행가의 은행가’[이준일의 세상을 바꾼 금융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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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이준일 경희대 회계·세무학과 교수


2024년 미국 대선은 도널드 트럼프의 압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선거의 가장 큰 경제적 쟁점은 단연 물가 상승이었다. “바보야, 문제는 인플레이션이야”란 말이 나올 정도로 2020년부터 2024년까지 21%가 넘는 급격한 물가 상승은 미국 시민들에게 큰 고통을 안겼고 집권당인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후보 부진의 이유로 지목되었다.

인플레이션을 관리하는 책임은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 있다. 미국 정계에 쏠렸던 세계의 눈은 선거 직후 연준의 기준금리 발표에 다시 집중되었다. 연준은 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하였고 미국 증시는 최고치 기록을 경신했다. 미국 정치와 경제의 커다란 결정들이 연이어 일어난 며칠이었다.

선거 기간 동안 트럼프는 법적 독립이 보장된 연준의 의사결정에 직접 관여하여 금리를 인하하겠다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연준이 설립되기 이전 미국에는 한 개인이 사실상 중앙은행 역할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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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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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피어폰트 모건(사진)은 1837년 미국의 부유한 금융가 주니어스 모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금융가로 성장한 모건은 미국의 금융계와 산업계를 좌지우지하며 심지어 미국 정부를 부도 위기에서 구할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895년 미국 재무부의 금 보유량이 거의 고갈되어 채무불이행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모건은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설득하였고 신속하게 채권을 발행하는 방안을 찾아내었다. 그 결과 긴급하게 유입된 350만 온스의 금 덕분에 미국은 디폴트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났다.

1907년 금융위기에서도 70세의 모건은 다시 한번 리더십과 자원을 동원하여 미국 경제를 구하는 역할을 했다. 은행과 신탁회사들이 대거 도산하고 예금 인출 사태가 일어나자 모건은 긴급히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주요 은행가들을 한 방에 모아둔 채 합의가 도출될 때까지 가두는 극단적인 회의로 협상을 이끌었다. 결국 은행들은 공동으로 자금을 모아 위기에 처한 은행들을 구제하기로 합의하였고 이로써 패닉을 잠재울 수 있었다. 중앙은행이 없던 미국에서 개인이 사실상 ‘은행의 은행’ 역할을 하며 미국 경제를 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태로 금융 거물의 지나친 영향력에 위기를 느낀 시민들과 정치가들은 정부 주도의 안정적인 금융 시스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1913년 연방준비제도법이 통과되어 공식적인 중앙은행 체계인 연준이 설립되었다. 연준의 설립으로 미국은 금융위기에 보다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고, 미국 경제의 건전성이 강화되었다.

모건은 금융위기 극복의 영웅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동시에 금융 권력의 집중, 트러스트를 통한 경쟁 억제 등으로 1912년 아르센 푸조 의원이 이끄는 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푸조 위원회는 소수의 금융 거물들이 미국의 주요 금융 기관과 산업을 지배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모건은 그 중심인물로 지목되었다.

본래 병약했던 모건은 고령에 푸조 위원회의 강력한 조사를 받으며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1913년 3월 31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족적은 연준의 설립과 반독점법 제정에 영향을 미쳤고 그의 이름은 세계 최대 은행인 ‘JP모건 체이스’와 손자가 설립한 ‘모건 스탠리’에 남아 여전히 세계 금융의 최전선에 살아 있다.

이준일 경희대 회계·세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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