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법학회 이끌고 초대 민사소송법학회·집행법학회장…이론·실무 겸비한 연구자
책 출간 앞두고 눈감아…민법 개정·헌재 제도 기여…술·골프 안하고 엄격한 성품
1997년 감사원장에서 퇴임하는 고인 |
(서울=연합뉴스) 이충원 임주영 기자 = 국내 민사소송법과 민사집행법의 일인자로 민사법 학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고 초기 헌법재판관으로 헌재의 이론적 기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이시윤(李時潤) 전 감사원장이 9일 낮 12시40분께 별세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병원에 마련됐다. 향년 89세.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58년 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판사가 됐다. 모교에서 6년간 교수로 일하기도 했다. 훗날 인권 변호사로 활동한 조영래 변호사 등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1980년대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 정월 초하루에도 책을 놓지 않아 세배객을 당황케 했다는 일화가 있다. 1982년에 쓴 민사소송법(이후 '신민사소송법'으로 개칭) 교과서는 이 분야의 독보적인 베스트셀러로 학계와 실무계에 큰 영향을 줬다.
독일어와 일본어에 모두 능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독일 이론을 소개해 민사소송법의 '탈일본화'에 공헌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민사소송법 일인자였다. 1988년 이일규(1920∼2007) 대법원장 지명으로 초대 헌법재판관이 됐다.
헌법재판소가 초기에 이론적 기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독일의 헌법재판 제도에 관해 많이 연구했고, 이를 토대로 초대 조규광 헌재소장을 설득해 국내에 도입하는 등 초창기 헌법재판 제도 확립에 공을 들였다. 제도 정착을 위한 외부 활동에도 힘쓰고 책자도 펴냈다.
특히 당시 헌법재판에서도 민사소송과 같은 가처분이 가능하다는 논지를 전개해 도입을 강력히 주장했다. 다만 재판관 재직 시절에는 실현되지 못했다고 고인의 한 지인은 전했다. 헌법재판 가처분 제도는 이후 도입돼 현재 널리 활용되고 있다.
논픽션 작가 이범준씨의 책에 따르면 '한정 합헌' 등 헌재의 각종 결정 양식이 고인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공권력을 문제 삼는 '권리구제형 헌법소원'이 만들어진 것도 고인의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또 검찰의 불기소도 헌법소원 대상으로 삼기 위한 논리적 근거를 만들었다.
헌법재판관 임기를 9개월 남긴 1993년 12월16일 총리로 영전한 이회창씨의 후임으로 김영삼 정부 2대 감사원장에 발탁됐다.
판사 시절에는 춘천지법원장에 이어 수원지법원장을 지냈다.
한국민사법학회 회장을 지내며 민사법 학계를 이끌었고 한국민사소송법학회와 한국민사집행법학회를 각각 창립해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신민사소송법, 민사집행법, 판례해설 민사소송법, 민사소송입문, 주석민사소송법, 주석민사집행법 등이 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고인은 '계속 연구하는 법관'으로 통했다. 국내 법학계에 교과서가 부족하던 시절 교과서 저술과 강의, 논문 집필에 매진했다. 서울지법 판사로 임관해 대법원 재판연구관,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민사·형사지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으로 일했다. 법원 재직 시절 이론을 겸비한 법관으로 통했다.
특히 민사소송법과 민사집행법에 관해서는 독보적인 대가로 인정받았다. 별세 전인 지난달까지도 새 저서(신민사소송법 개정 18판) 저술 작업에 매달렸다. 연내 출간 예정인 이 책의 내용을 충실히 하기 위해 독일과 일본의 책자와 자료를 검토하고 마무리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2022년에는 민사집행법 제정·시행 20주년을 맞아 열린 세미나에 직접 참석해 법조 후학을 위해 법 제도·실무상 개선 방향을 제안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고인은 민사소송법 개정, 민사집행법 제정에서 주요 역할을 했다. 대륙법계 모델인 독일의 경우 여전히 민사소송법 안에 집행 분야가 포함돼 있다. 그만큼 국내 독자적인 연구풍토 조성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특히 '집행을 못 하는 민사소송은 있을 수 없다'면서 민사 실체법과 집행법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는 지론을 평소 강조했다.
민사법학회 회장 시절에는 법무부 민법개정위원장을 맡아 시대 흐름과 변화를 고려한 민법의 전면 개정과 성안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당시 국회 처리는 이뤄지지 못했다. 재산 분할 등의 가족법 개정, 유류분 변화 등 부분적 개편은 있었지만 전면 개정은 이론적 뒷받침이 필요한 어려운 작업이다. 그 뒤를 이어 양창수 전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아 개정 추진을 이끌고 있다.
공직 퇴임 후에는 경희대 법대 교수와 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변호사 등을 지냈다.
지인들에 따르면 술과 골프 등을 하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학자적 성향을 유지해 사적인 교류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저술할 때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이론적 완결성'을 추구했고 '독일의 이 자료는 찾아봤나', '일본의 이 책은 읽어봤는가'라고 물어보는 등 꼬치꼬치 확인해 제자들이 진땀을 뺐다고 한다. 신민사소송법 18판은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며, 역시 개정 작업이 거의 마무리된 민사집행법 책은 9판이 나올 예정이다.
법조계와 학계에서 가까운 지인과 제자로는 김석수 전 국무총리, 양창수 전 대법관, 조재연 전 대법관, 조관행 변호사, 전병서 중앙대 로스쿨 교수, 김경욱 고려대 로스쿨 교수, 정선주 서울대 로스쿨 교수 등이 있다.
유족은 아들 이광득(광탄고 교장)·이항득(사업)씨와 며느리 김자호·이선영씨, 손녀 이지원(초등교사)씨, 손녀사위 류성주(서강대 교수)씨 등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발인 12일 오전 8시, 장지 안산시 와동 선영. ☎ 02-2227-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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