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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 (금)

임산부석 앞에서 눈치 봐야 하는 임산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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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 있어도 일어나 달라고 말하기 어려워"

시민 비워두기 인식은 여전히 부족

정부 배려석 확대에 시민 반응 회의적

“아직 겉으로 티가 안 나서 임산부 배지를 챙겨 다니는데 임산부석에 앉은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있거나 핸드폰을 하고 있으면 일어나달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임신 2개월 차인 이모씨(31)는 출퇴근 시간이 힘겹기만 하다. 대중교통을 통해 출퇴근하고 있는데 몸이 힘들 때도 임산부 배려석을 이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씨는 “괜히 말했다가 해코지당할까 봐 그냥 참는다. 정말 힘들 때 양해 구하는데 그럴 때마다 서럽다”고 토로했다. 이는 이씨만이 아닌 임산부 대부분이 경험하고 있는 일이다.

지난 6일 출근 시간대인 오전 8~10시께 확인해본 대중교통 상황도 그러했다. 서울 시내버스 10대를 확인해봤는데, 임산부석에는 모두 비임산부들이 앉아 있었다. 지하철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4호선, 5호선을 차례로 둘러봤으나 임산부석이 비어있는 경우는 없었다.

아시아경제

6일 오전 9시께 서울 지하철 임산부석에 시민들이 앉아 있다. 심성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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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석에 앉아있던 노인에게 배려석인 걸 아는지 묻자 “임산부가 오면 일어나려고 했다”고 말하며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서울 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는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두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임산부가 좌석에 언제든지 편하게 앉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지난 1월부터 9월까지 임산부 배려석과 관련된 민원만 4668건이 접수됐다. 한 달에 500여건꼴로 민원이 접수된 셈이다.

임산부를 위한 대중교통 좌석을 마련했는데, 정작 임산부들이 이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해당 정책이 강제가 아닌 자율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이나 버스 임산부석에 비임산부가 앉았다고 해서 어떤 제재나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이 배려의 마음으로 임산부석을 비워두고, 임산부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언제든 비어 있는 좌석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출퇴근 시간 대중교통의 과밀도 임산부 배려석 제도의 연착륙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특정 좌석은 앉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제도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임산부들이 편안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와 관련해 정부가 ‘임산부 배려석’ 정책을 확대할 방침이다. 일부 광역버스에만 지정했던, 임산부 배려석을 모든 광역버스로 확대할 예정이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지난달 30일 출퇴근 등으로 서울~경기 지역 간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하는 임산부의 편의 증진을 위해 광역버스 내에 임산부 배려석(교통약자석)을 시각적으로 확실히 구분해 운행하겠다고 밝혔다. 시민들의 시선은 회의적이다.

4개월 차 임산부인 유모씨(30)는 “임산부석을 늘리는 방향에는 동의하지만, 그 전에 지금 있는 자리를 비워두는 캠페인부터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진우씨(28)도 “출퇴근할 때 임산부석이 비어있는 걸 본 적이 없다”며 “지금도 제대로 안 지켜지는데 임산부석을 무턱대고 확대하는 건 의미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는 “"광역버스 임산부 배려석 확대 취지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지하철 및 버스 임산부석 운영에서 나타난 문제점과 한계를 면밀히 검토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송 교수는 “지금도 임산부석을 둘러싼 오해와 갈등이 계속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그저 여러 정책 중 하나로 가볍게 시행하면 실효성이 더욱 떨어질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배려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성아 기자 hear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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