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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가을볕 좋은 날, 다람쥐가 나무 열매를 먹고 있다. 이맘때 다람쥐는 겨울에 먹을 도토리를 숨기느라 몹시 바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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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목싸목. 숲길을 걷다 들꽃을 만날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다. 구절초, 쑥부쟁이, 황국 등 들국화가 서릿가을의 향기를 싸목싸목 풀어놓고 있다. 키 작은 꽃들도 반가워 쪼그려 앉아 인사하면, 그새 은은한 꽃향기가 내게로 스며든다. 싸목싸목은 천천히, 서서히, 느릿느릿의 전라도 사투리다.
툭! 발끝에 닿은 도토리가 숲의 고요함을 깨고 데구루루 굴러갔다. 어릴 적엔 열매가 보이면 호주머니가 터져라 주워 넣었다. 다람쥐야 배를 곯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요즘엔 검은 봉지를 들고 다니며 도토리를 주워 담는 이들이 보기 싫다. 배고픈 산짐승들이 사람 있는 곳으로 내려와 총에 맞아 죽을까 겁도 난다. 눈에 띄는 도토리를 모조리 주워 숲속으로 던졌다. 그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애들아, 잘 뒀다가 겨우내 맛있게 먹어~”
도토리 하면 다람쥐가 떠오를 게다. 그래서 돼지는 섭섭하다. 다람쥐보다 도토리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돼지가 도토리를 먹는다고? 고개를 갸웃대는 이가 있겠다. 사실이다. 멧돼지는 사족을 못 쓴다. 고깃집에서 ‘이베리코 돼지고기’를 먹어 본 이도 많겠다. 도토리를 먹고 자란 돼지다. 고기깨나 먹어 본 사람은 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온 돼지고기가 얼마나 쫄깃쫄깃 맛있는지.
돼지의 섭섭함을 풀어줘야겠다. 돼지가 도토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낱말로도 알 수 있다. 최세진이 16세기에 펴낸 ‘훈몽자회’에는 도토리가 ‘돝의밤’으로 나온다. 돝은 돼지의 옛말. 그러니까 돝의밤은 돼지의 밤, 돼지가 즐겨 먹는 밤이다. ‘향약구급방’에는 도토리가 ‘저의율(猪矣栗)'로 적혀 있다. 풀이하면 돼지의 밤으로, 돝의밤의 한자어 표기다.
당나라 두보의 시를 한글로 풀이한 책 '두시언해'에서도 '도톨왐'과 '도톨밤'을 볼 수 있다. 도톨왐은 ‘도톨+밤’이다. 도톨밤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다. 도토리같이 둥글고 작은 밤이다. 도톨밤의 ‘도톨’이 접사 '-이'를 만나 도토리가 되었다.
개는 도토리를 먹지 않는다. 우리 집 강아지 밥에 도토리를 넣어봤다. 정말로 도토리만 덩그러니 남았다. 옛말 ‘개밥에 도토리’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따돌려져 무리에 끼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을 ‘개밥에 도토리’라고 이른다.
이맘때 다람쥐는 겨울에 먹을 도토리를 숨기느라 무척 바쁘다. 그런데 막상 겨울이 오면 묻은 곳을 잊어버린다. 땅속에 묻힌 도토리는 참나무로 쑥쑥 자란다. 다람쥐 덕에 숲은 넉넉해진다. 다람쥐의 건망증이 참 사랑스럽다. 잊고 싶은 일이 있다면 숲길을 걸으시라. 싸목~싸목~
노경아 교열팀장 jsjys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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