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정숙한 세일즈'는 1992년 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성인용품 판매에 뛰어든 '방판 시스터즈' 4인방의 이야기를 그렸다. 사진 JT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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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했니?”
일단 써봐야 팔 수도 있다며 직접 여성 성기구를 써본 정숙(김소연)에게 금희(김성령)가 묻는다. 그러자 쑥스러워하며 망설이던 정숙이 작은 목소리로 털어놓는 고백이 우스우면서도 도발적이다. “네, 잠시. 안 써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써본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JTBC 토일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 나오는 이 장면은 이 드라마가 가진 파격적인 소재를 잘 보여준다. 1992년 가상의 시골 마을 금제시를 배경으로 성인용품을 방문판매하는 여성 4인방의 이야기. 동네 아주머니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갖가지 성인용품들을 신문물이나 되는 듯 소개하는 대목에는 '야한' 속옷과 피임용품은 물론, 성기구까지 등장한다.
물론 간간이 귀여운 모자이크 처리를 해 적절한 코미디 버전으로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도 아닌 레거시 미디어인 TV 드라마에서 그간 다뤄지지 않았던 성을, 그것도 여성들의 성을 소재로 가져왔다는 건 실로 파격적이다.
직접 슬립을 입고 적극적으로 홍보 중인 방판 시스터즈의 모습. 사진 JT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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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재가 그렇다고 해서 ‘정숙한 세일즈’를 그저 '야시시한' 드라마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극과 선정성이 아니라, 여성들의 성적 해방과 더불어 성장 서사를 그리고 있어서다. 이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건 정숙을 비롯해 금희, 영복(김선영), 주리(이세희) 등 각자가 처한 현실을 통해 드러나는 문제의식을 통해서다.
남편이 친구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고도 선뜻 이혼을 선택하지 못했던 정숙은, 이혼이 일종의 주홍글씨가 되어 괴로워도 참고 살았던 당대의 여성들의 문제를 꺼내 놓는다. 또 약사 남편 덕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아왔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된 금희는 일을 함으로써 자존감을 되찾고 싶어하고, 가난한 데다 무능한 남편 때문에 억척스럽게 생활 전선에 뛰어들게 된 영복은 그 가난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미혼모로 아들을 홀로 키우며 미용실을 운영하는 주리는 당대의 편견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려 한다. 즉 ‘정숙한 세일즈’는 19금 소재 자체보다 이 일을 함께 하는 4인방이 저마다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넘어서고 성장해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왼쪽부터 영복(김선영), 정숙(김소연), 금희(김성령), 주리(이세희)는 뜻하지 않게 시대를 앞서간 물건들을 판매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힘이 돼준다. 사진 JT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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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작품에서 주목되는 건 편견이 만들어내는 폭력들을 다양하게 꺼내 놓고 이를 통쾌하게 해결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정숙은 성인용품을 판매한다는 이유로 보수적인 마을 사람들에 의해 손가락질을 당한다. 심지어 낙서 테러를 당하기도 하고, 그렇고 그런 여자 아니냐며 성폭력을 당할 위기까지 겪는다. 그런데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피해자인 정숙 편에 서서 그를 도와주거나 위로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일’을 해서 당한 것이라는 말로 더 큰 상처를 준다.
이 상황은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2차 피해’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분명 피해자인데,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죄인 취급 받는 편견 가득한 세상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폭력이다. 이런 상처에도 그저 참고만 있는 정숙을 일깨우는 건 순수한 아이들이 하는 대화다.
"덩치가 큰 아이는 피하는 게 답"이라는 동우(정민준)에게 정숙의 아들 민호(최자운)는 이렇게 말한다. “근데 우리가 왜 피해? 잘못한 게 없는 사람이 왜 숨어 지내냐고? 안 억울해? 부딪쳐서 다칠망정 맞서봐야지. 그래야 아름다운 이 지구에 밝은 미래가 찾아오는 거야.” ‘지구방위대 후뢰시맨’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한 아들의 말에 정숙은 피할 게 아니라 싸워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결국 가해자 앞에 나서 당당하게 함께 맞서는 여성들의 연대는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킨다.
김소연이 연기한 정숙은 남편의 불륜으로 초등생 아들을 홀로 키우게 된다. 사진 JT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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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영국의 성인용품 판매원의 이야기를 그린 영국 드라마 ‘브리프 엔카운터스(Brief Encounters)’가 원작인 ‘정숙한 세일즈’는 리메이크를 통해 한국적 정서를 고려한 다양한 장치들을 활용했다. 1992년의 시골 마을 설정은 우리네 90년대의 복고적 요소들을 활용해 추억을 소환한다. 김완선과 심신의 노래가 캐릭터들과 어우러져 흘러나오고,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유명한 키스신이 등장한다.
당대를 살았던 기성세대들에게는 향수가, 젊은 세대들에게는 빈티지적 감성이 돋는 장면들이다. 이 복고적 요소들은 단지 추억 팔이가 아니다. 거기에는 시골 마을 특유의 토속적인 느낌이 묻어 나는데, 이것은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나 19금 소재에 대한 불편한 느낌을 상당 부분 희석시키는 효과도 가져온다.
형사 도현(연우진)은 사건 수사를 위해 위장 부부가 된 정숙(김소연)에게 마음이 흔들린다. 사진 JT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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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가족 드라마적 요소와 로맨스도 빠지지 않는다. 정숙을 비롯한 방판 4인방이 성인용품을 파는 일에 나서게 되는 이유 자체가 가족의 생계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다. 그래서 이 작품은 19금 소재를 빼면 한 편의 가족 드라마이자 멜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훈훈한 가족애와 달달한 로맨스, 워맨스가 등장한다.
과연 편견 가득한 세상에서 이를 버텨내며 그 상처를 이겨내고 자신을 성장시키는 건 어떻게 가능할까. ‘정숙한 세일즈’는 그것이 어쩌면 서로의 아픔을 이해해주고 함께 살 길을 열어 나가는 동병상련의 마음들이 만들어내는 단단한 결속이라고 말하고 있다. 19금 소재 자체보다 연대한 여성들의 성장서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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