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도쿄 특파원 |
“우리보고 비자금 정당이라는데, 민주당은 무려 2억 엔(약 18억 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일본 중의원(하원) 선거(총선) 막판 도쿄의 한 유세 현장에서 자민당 관계자가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목청을 높였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선거 유세장에서는 당 관계자, 지방의회 정치인 등이 아슬아슬한 발언을 하며 분위기를 띄운다. 언론에 알려진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의 야당 비판은 그나마 ‘톤 조절’이 된 발언이었다. 보도되지 않은 야당 비판은 훨씬 많았고 수위도 높았다.
행인조차 외면한 자민당 유세
자민당이 꺼내 든 ‘민주당 뒷돈 2억 엔’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당시 총리가 정치자금 보고서에 거짓 기재한 기부금이 2억 엔에 달한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정권 교체 후 집권 9개월 만에 사임하는 단초가 됐던 큰 사건이었다.
일본 국민들은 지난해부터 불거진 비자금 문제에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데, 정작 자민당은 “15년 전 야당이 더 지저분했다” “민주당 정권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기억하지 않느냐”며 야당을 물고 늘어졌다. 제 눈에 들보가 가득한 여당이 야당을 비난하며 표를 달라고 하니 국민들이 좋게 봐 줄 리 만무했다.
유권자가 등을 돌렸다는 건 유세장에서 감(感)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전철역 인근 시장통 유세에서 ‘민주당 2억 엔’ 발언이 나오자 멀리서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연설을 듣던 허름한 옷차림의 한 남성은 “지금 뭐라는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명색이 3주 전까지 총리로 매일 TV에 나오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총리가 유세를 한다고 당 홈페이지에 공지가 떴는데도 수십 명이 서면 꽉 찰 것 같은 유세차 앞 좁은 공간마저 헐렁했다. 당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금 기시다 전 총리가 유세 중입니다”라고 연신 소리를 치며 호소하는데 행인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세장에서는 연단 앞이 아니라 먼 밖을 취재해야 한다.” 한국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 통하는 금언은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차피 연단 앞은 무슨 말을 해도 호응해 주는 당 관계자, 극성 지지자들 차지다. 자민당이 잘나가던 시절에는 연단 밖에 사람들이 모여 커다란 원이 세 둘레 네 둘레씩 생겼다고 한다. 이번에는 이시바 총리가 와도 멀찌감치에 한 둘레가 겨우 생길까 말까였다. 그나마 총리급 유명 연사가 와야 그 정도였다. 도쿄 중심부에 출마한 자민당 비자금 연루 의원이 단 한 명의 청중도 없이 허공에 대고 연설을 하는 모습을 기자는 목격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때는 돈을 푸는 아베노믹스로 ‘비리는 있지만 경제는 잘한다’는 평가라도 있었지만, 지금의 자민당은 경제조차 무능했다. 21세기 선진국에서 쌀을 못 구해 발을 구르는 ‘쌀 파동’을 겪으며 5kg에 2000엔도 안 하던 쌀값은 3500엔을 넘었다. 한국처럼 요란하게 ‘대파 흔들기’ 같은 반발은 보이지 않았지만, 유권자들은 조용히 투표소에서 표로 심판했다.
반성 없는 정권은 심판받는다
일본에서 자민당은 단순히 특정 정파를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다. 헌법을 고쳐 전쟁 가능 국가로 가야 한다는 강경 우익부터 성소수자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는 진보 유권자까지 아우르는 자타 공인 ‘국민정당’이다. 영원한 집권 여당으로 모든 허물을 용서받을 것 같던 ‘절대 1강’ 자민당조차 민심과 여론에 귀를 닫으니 참패 성적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당 지지율(10월 1일 아사히신문)로는 자민당 33%, 입헌민주당 6%로 비교하기 어렵지만, 정신 못 차리는 여당에 회초리를 들겠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제 허물을 반성하지 않는 여당은 나라를 막론하고 심판을 받게 마련이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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