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된 노동규제에 멍드는 韓 첨단산업
반도체는 '지식+시간' 결과물…규제 과도
美·日, 노동시장 유연화 제도적 뒷밤침
반도체 특별법서 근로시간 규제 풀어야
美·日 비해 과도한 韓 노동규제
재계 한 고위관계자는 3일 이데일리에 “반도체는 지식과 시간을 결합한 결과물”이라며 “미국, 대만 등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몰두하고 있는데, 한국은 상대적으로 근무시간 관련 규제가 과도해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 반도체가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차세대 기술 확보의 필요조건인 R&D에 ‘올인’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기술 인재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근로환경 조성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은 주당 최대 근로시간을 제한하고 있지 않다. 주 40시간 이상 일할 경우 추가 근로시간에 대해 정규 임금의 최소 1.5배를 받는다. 블룸버그는 최근 “엔비디아 직원들은 새벽 1~2시까지 일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 7일 근무도 주기적으로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TSMC의 류더인 전 회장은 지난해 6월 미국 애리조나 공장 근무시간에 대한 임직원들의 불만을 두고 “일할 준비가 안 돼 있는 사람은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면 안 된다”고 일침을 가해 주목받았다.
(그래픽=김일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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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국들은 이미 노동시장 유연화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미국이 시행 중인 ‘화이트 칼라 이그젬션’(White Collar Exemption)이 대표적이다. 이는 △고위관리직, 전문직 등에 종사하는 근로자가 주 684달러 이상을 벌거나 △연소득이 10만7432달러를 넘을 경우 근로시간 규제에서 제외하는 제도다. 미국은 이를 86년 전인 1938년 처음 도입했다. 직무와 소득 요건을 갖춘 근로자에게는 자동으로 적용한다. 미국이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바탕에는 화이트 칼라 이그젬션이 자리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일본은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2018년부터 시행 중이다. 금융상품 개발, 경영 컨설턴트 등 생산직이 아닌 근로자 가운데 연 1075만엔 이상 고소득자는 근로시간 규제에서 예외를 적용하는 것이다.
“한국형 노동유연성 제도 절실”
주요국들이 이같은 예외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특정 직종은 근무시간에 비례해 업무 성과를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재계 한 인사는 “근로시간으로 성과를 관리하는 체계는 과거 제조·생산직 중심 산업구조에서 적합했다”며 “개발·사무직의 비중이 급증한 지금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한국은 업무나 소득간 구분이 없는 경직된 근로시간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경직적인 근로시간 제도는 R&D의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의욕을 저하시킨다”며 “한국 엔지니어들에게 R&D에 최적화한 근무 환경을 제공할 수 있도록 기업과 정부 모두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를 K반도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방안으로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의미다.
대한상공회의소 SGI는 최근 보고서에서 “기업들이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유연한 인력 운용이 필수적”이라며 △노동법제의 고용친화적인 정비 △근로시간에 대한 획일적인 규제 개선 △직무·성과 중심으로의 임금체계 개편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렇자 업계에서는 ‘한국형 화이트 칼라 이그젬션’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정부와 국회가 협의 중인 반도체 특별법안에 반도체 R&D 인력 등을 근로시간 규제에서 제외하는 조항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이를 도입하면 미국, 일본처럼 전문직 종사자들의 근무시간 자율성을 제고해 한국 첨단산업을 책임질 엔지니어들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며 “근로시간 배분과 업무 방식 결정 등에 있어 개인의 자율성이 커지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국내에서 유사한 법안이 발의된 사례가 있다. IT업계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김병관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9년 근로소득 상위 3% 근로자에 대해 근로시간 기준 적용을 제외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한 적이 있다. 이는 일정 수준 이상 급여를 받고 인사와 경영 등에 직간접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직급의 근로자를 근무시간 기준 적용에서 제외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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