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02 (토)

"버려진 '멋' 발견했죠"…군용텐트 20t 쌓인 의류회사 창고 [비크닉]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 b.애쓰지(ESG)

저 회사는 정의로울까? 과거 기업의 평가 기준은 숫자였습니다. 요즘은 환경(Environmental)에 대한 책임, 사회(Social)적 영향, 투명한 지배구조(Governance) 등 이른바 ‘ESG 관점’에서 기업을 판단합니다. 비크닉은 성장과 생존을 위해 ESG에 애쓰는 기업과 브랜드를 조명합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격언은 잠시 잊어주세요. 착한 일은 널리 알리는 게 미덕인 시대니까요.

날이 쌀쌀해지면서 아침마다 옷장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가득 쌓인 옷을 보고도 '입을 게 없어’ 한참 고민에 빠지죠. 핑곗김에 새 옷을 사고, 버리고, 한 계절이 지나면 또 채워 넣지만 마음 한 켠의 불편함을 지울 순 없습니다.

지속가능 패션은 이런 이들에게 좀 더 나은 소비의 대안이에요. 친환경 소재를 개발하고, 버려진 원단으로 새로운 쓰임을 만들어내는 노력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비자와 만나기까지 쉽지 않은 탓에 최근엔 지속가능 패션이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이 생겨납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하 콘진원) 역시 지난 2022년부터 매년 10개의 국내 지속 가능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를 선발해 제작부터 홍보·마케팅을 함께 합니다.

중앙일보

'2024 지속가능패션 토크' 행사의 슬로건. 소비하지 않을 수 없다면, 살 때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았다. 사진 한국콘텐츠진흥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기 위해 7일부터 4일간 서울 성수동에서 행사를 열어요. 문화관광체육부와 콘진원이 주관·주최하는 ‘2024 지속 가능 패션 토크’, 그리고 브랜드를 알리는 팝업 전시입니다. 이 행사의 슬로건은 ‘허투루 버릴 수 없다, 잘 샀다 잘 산다’인데요, 이왕 살 때 ‘잘’ 산다면 오래 쓰고 애착이 생겨 쉽게 버릴 수 없다는 의미죠. 결국 지속 가능한 패션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애착’일 거에요.

이번 비크닉은 행사에 앞서 참여 브랜드 중 주목할 만한 세 곳을 만나고 왔어요. 이미 충분한 옷이 존재하는 지구에서, 또 새로운 옷을 만들어야 하는 디자이너라면 어떤 옷을 만들지 고민한 이들의 해법이 좋은 소비의 힌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중앙일보

오는 11월 7일부터 서울 성수동에서 열리는 '2024 지속가능패션토크' 포스터. 8일부터는 팝업 행사가 진행된다. 사진 한국콘텐츠진흥원





자연 친화적 보호막을 꿈꾸다



중앙일보

쉘코퍼레이션은 등산·러닝·백패킹 등 도시와 자연을 오가는 라이프 스타일을 누리는 여성들을 위한 아웃도어 제품을 만든다. 사진 쉘코퍼레이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편하고 예쁘고 친환경적이며, 제대로 된 기능을 갖춘 등산복. 유은진(35) ‘쉘코퍼레이션’ 대표의 고민이었어요. 등산복의 세계는 주로 군복에서 모티브를 따온 탓에 여성의 선택지가 적었죠. 등산·캠핑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옷에 관심 많은 유 대표는 “내가 입고 싶은 등산복을 환경적 의무를 다하면서 만들어보자”라는 목표를 세웠죠.

시작은 하이킹 양말이었어요. 등산복으로 레깅스를 즐겨 신는 여성들은 양말 선택에 공을 들이잖아요. 주로 투박하게 보온성에만 신경 쓴 기성 브랜드의 등산 양말 대신, 레깅스에 신어도 예쁜 메리노 울 65%의 양말을 만들었죠. 합성 소재가 아닌 친환경 메리노 울 함량이 높아 땀 흡수 등 성능도 좋았어요. 크라우드 펀딩으로 시작한 울 하이킹 양말은 대성공. 이랜드에서 제품 개발을 하던 유 대표가 회사를 박차고 나와 창업한 계기가 됐죠.

지난 2021년 시작된 쉘코퍼레이션은 등산·러닝·트레일 러닝·백패킹 등 도시와 자연을 오가는 라이프 스타일을 누리는 여성들을 위한 아웃도어 제품을 만들어요. 트렌디한 디자인은 물론 아웃도어 제품이기에 무엇보다 ‘고기능’에 초점을 맞춰요. 물론 고기능이면서 친환경, 쉽지 않은 과제죠.

화학적이거나 인위적 공정을 빼고 방수와 발수, 흡습 등을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는 어려워요. 처음에는 좋아도 서너 번 세탁 후 기능이 반감된다면 제품 수명을 떨어트리니 오히려 환경에 좋지 않을 수 있고요. 친환경적이면서 기능성도 갖춘 원단은 30~50% 가까이 비싸고요.

중앙일보

지난 24일 서울 노원구의 서울창업디딤터에서 유은진 쉘코퍼레이션 대표를 만나 인터뷰했다. 사진 박현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유 대표가 자체 특허 원단에 도전한 이유에요. 쉘코퍼레이션은 ‘리엔젤(RE:ANGEL)’이라는 친환경 원단을 개발, 올해 특허를 출원했어요. 재생 나일론에 특수한 코팅과 처리를 더 해 만든 원단으로 전문 산악 수준의 투습 방수 기능성(내수압 10000+mm, 투습도 22000+g)을 갖춘 것은 물론 1벌당 1kg의 탄소 배출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고 해요.

매달 고객들과 하이킹 세션을 진행하면서 직접 산에 올라가 제품 테스트도 하고 의견 수집을 하고 있다는 유 대표는 “궁극적으로는 밖으로, 자연으로 나가고 싶은 여성들에게 편안한 영역(comfort zone)을 확장해주는 브랜드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힘줘 말했어요.



이질적인 것들을 손으로 직조하다



르쥬는 역사를 전공하다 패션을 공부하러 파리로 향한 제양모(35) 디자이너와 음악을 하다가 패션에 빠져든 강주형(31) 디자이너가 의기투합해 지난 2018년 시작했어요. 둘은 졸업 후 알라이아·랑방·발망 등에서 경력을 쌓은 뒤 파리에서 남성복 캡슐 컬렉션을 내면서 첫선을 보였죠. 지난 2020년 여성복을 론칭하면서 본격적으로 브랜드의 외연을 넓혀왔어요.

르쥬의 옷은 일견 실험적으로 보여요. 대중들에게 브랜드를 인식시킨 계기도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엘 팬츠’였죠. 동화 ‘오즈의 마법사’ 강철 로봇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패턴의 바지인데,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면서 해외 패션 매체 100군데 이상에서 소개가 됐다고 해요. 국내선 K-팝 아티스트들이 르쥬의 옷을 찾게 된 계기가 됐고요.

중앙일보

지난 25일 서울 약수역 인근 르쥬 쇼룸에서 제양모(왼쪽), 강주형 디자이너를 만나 인터뷰 했다. 사진 박현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옷이 실험적으로 보이는 배경에는 특유의 정교한 패턴, 공들이 수작업이 자리해요. 발망에서 수작업 담당 디자이너였던 제 대표는 “색다른 소재와 수공예를 엮어 완성도 높은 옷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해요. 이런 수공예 요소는 화학적·기계적 공정을 최소화해 자연스레 지속 가능성을 획득하게 만드는 비결이기도 하고요. 이번 2025 봄·여름 컬렉션에서도 손뜨개(크로쉐) 패턴을 활용한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는데, 국내 중년 여성들로 이뤄진 사회적 기업 등과 연계해 작업했다고 해요.

소재 선택에도 남다른 르쥬는 버려진 샹들리에나 오래된 병풍 같은 소재를 옷에 더하기도 해요. 낡은 병풍 위에 섬세하게 수 놓인 패턴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를 그대로 뜯어 물에 오랜 시간 불리고 가공해 셔츠로 만든 작품도 있죠. 파리에서 브랜드를 처음 시작할 때도 큰 패션 하우스가 기부한 버려진 원단을 가지고 옷을 만들었죠. 최대한 패턴을 정밀하게 짜 원단 낭비를 최소화하는 것도 르쥬가 실천하는 것 중 하나에요.

중앙일보

정교한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르쥬의 작업들. 이번 2025 봄,여름 시즌에는 크로쉐 패턴을 활용한 다양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사진 르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속 가능성과 럭셔리라는 언뜻 조화시키기 어려운 두 가치에 대해 제 디자이너는 “아무리 지속 가능한 제품이어도 착용감이 좋지 않거나 아름답지 않으면 선택받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며 “색다른 방식과 새로운 시선으로 완성도 높은 옷을 보여주되, 알고 보면 지속 가능하기까지 하다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버려진 소재에 쓸모를 부여하다



정관영(38) 대표가 2015년 론칭한 카네이테이는 국내 대표적인 업사이클링 브랜드에요. 미군이 사용하는 오래된 텐트 천을 활용해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방으로 알려져 있죠.

본래 새것보다는 낡은 것의 물성을 좋아한다는 정 대표는 이태원 뒷골목에서 발견한 군용 텐트에서 가능성을 봤어요. 방수 소재인 데다, 내열성도 있고 마모에도 강하죠. 낡고 헤진 사용감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멋은 덤이고요. 처음에는 적은 양의 텐트를 보이는 대로 매입했다고 해요.

중앙일보

카네이테이는 버려진 군용 텐트를 업사이클링해 액세서리와 의류를 만든다. 사진 카네이테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매입한 대량의 텐트 중 재사용 가능한 부분을 선별해 세척한 후, 손 재단으로 원단을 만들어요. 텐트의 낡은 정도에 따라 색감과 질감이 다르기 때문에 재단 후에는 패턴 조각의 짝을 맞추는 과정을 거치죠. 원단의 오래된 정도에 따라 스크래치와 색감이 모두 달라 완성하고 나면 제각기 독특한 특징을 지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제품이 되죠. 2015년 론칭 당시엔 신세계 분더샵에서 단독 유통을 하는 쾌거를 이뤘죠.

벌써 브랜드를 전개해 온 지 9년째. 군용 텐트로 만든 다양한 제품은 여전히 카네이테이의 근간을 이루고 있어요. 창고에 미군용 텐트만 20t 가까이 적재돼 있다고 해요. 최근에는 군용 텐트로 만든 가방과 액세서리 이외에도 브랜드 특유의 감성을 살린 맨투맨 셔츠, 워크 웨어에서 모티브를 따온 재킷과 슬랙스, 모자 등을 함께 내고 있어요. 물론 리사이클(재활용) 원단이나 지속 가능한 면(BCI 코튼)을 활용하고요.

중앙일보

지난 25일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에서 열린 카네이테이 팝업 스토어 현장에서 정관영 대표를 만나 인터뷰했다. 사진 박현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정 대표의 목표는 세계적으로 인지도 있는 업사이클링 브랜드가 되는 것이라고 해요. 최근에는 시스템적으로 최적화한 업사이클링 브랜드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효율적으로 재료를 쓰고, 관리하고, 디자인과 마케팅이 고루 맞물려 좋은 시너지를 내는 브랜드요.

지난 9년간 “맨땅에 헤딩하듯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왔다”고 말하는 그는 최근 카네이테이의 정체성과 트렌드 사이의 교집합을 고민하고 있어요. 업사이클링 제품이라는 독특한 브랜드의 태생도 중요하지만, 다른 패션 브랜드와 동등한 면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죠. 정 대표는 “옳고 그르다가 아니라 디자인이 좋아야 소비가 이뤄지기에, 좋은 의도를 설득력 있게 풀어나갈 수 있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어요.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