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러시아 파병은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첫 대규모 해외 파병이다. 북·러 조약에서 부활한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조항에 따른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반격한 러시아 쿠르스크에 1만명 정도의 북한 병력이 배치될 것이라고 한다. 이로써 이 전쟁은 제3국 정규군이 뛰어든 국제전이 되고 있다.
이번 파병을 보며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을 떠올리게 된다. 전선에 투입되는 모든 군인은 총알받이다. 60년 전 베트남에 간 한국군도 그랬다. 1964년부터 9년 가까이 계속된 이 전쟁에 한국군은 미국 다음으로 많이 참전해 5000여명이 죽고 1만여명이 다쳤다. 젊은이들이 이역만리의 명분 없는 전쟁에 끌려간 점도 비슷하다. 북한군이 러시아 돈을 받는 용병이라지만, 한국군도 다르지 않았다.
60년 시차를 둔 남북의 선택이 전 세계 진영 분열에 편승한 약소국의 생존 전략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쿠데타로 집권해 정통성이 약했던 박정희는 떠나가는 미국을 붙잡으려 파병을 했고, 권력세습 후 인민생활 향상 약속을 지키지 못한 김정은은 대미·대남 관계 개선을 통한 길이 막히자 옛 친구 러시아에 시선을 돌렸다. 그때 미국과 지금 러시아의 비중이 다르지만, 강대국 입장에선 고사리손이라도 빌려야 하고 변방의 약소국 독재정권은 냉전 구도를 강화하며 운신의 폭을 넓혀야 하는 처지가 닮았다.
한국군의 희생에도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패배했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참전이 전황을 유의미하게 바꿀지 의문이다. 박정희의 파병이 남북한의 군사적 힘 관계를 크게 바꾸지 못한 것처럼, 북한군의 이번 참전이 대남 전쟁 수행 능력에 근본적 우위를 안겨줄지도 미지수이다. 향후 러시아가 반대급부를 줄 수 있지만 지켜볼 일이다. 강대국은 약소국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정은의 관심은 경제적 이득에 더 있지 않을까. 한국의 경험을 눈여겨봤을 것이다. 한국이 9년간 베트남전에서 벌어들인 돈은 50억달러였고 그 기간 GDP가 4배 증가했다. 박정희 때와 이름도 비슷한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펴는 김정은은 그런 돈이 절실하다. 아무리 폐쇄적인 독재국가라도 명분 없는 전쟁에 자국민이 끌려가 죽는데 북한 내 반작용이 없을 수 없다. 그럼에도 김정은으로선 장기적 생존의 길을 닦는 게 우선이라며 이 길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이번 파병은 김정은의 ‘두 국가론’과 떼어놓고 보기 어렵다. 그는 선대의 민족 통일론을 폐기했다. 1930년대 민생단 사건, 1956년 8월 종파 사건 등을 거치며 북한 엘리트 사이에 자리 잡은 자주 노선을 폐기하고 북한식 국제화로 가는 모습이다. 하노이 대미 협상 실패 후 미국 패권 쇠퇴와 다극 세계질서 부상 등을 보고 현실적 노선을 택한 것 같다.
이는 다시 박정희의 한·일 수교와 베트남 파병 때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북한이 남조선혁명론, 조국통일론을 펼 때 박정희는 수세적으로 대응하며 북한에 뒤처져 있던 경제발전에 국가 자원을 우선 투입했다. 김정은의 행보는 박정희의 ‘선건설론’과 유사하다(정영철, ‘북한의 ‘두 개 국가론’’).
그것이 북한에 어떤 기회를 안겨줄지는 두고 봐야 한다. 체제 위협 가능성이 있는 대미·대남 관계 개선보다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당장 현금 유입으로 규모가 작은 북한 경제에 활력이 생겨날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미·중관계를 중심으로 한 신냉전의 향배에 달렸다. 중국이 북·러 밀착에 거리를 두지만 이들과 결별할 것 같지는 않다.
베트남에 보낸 군대가 다 돌아오고 6년 후 박정희가 제거되었다. 그가 사라졌어도 대한민국은 지속됐다. 집권 13년차에 선대가 가지 않은 길을 내딛는 김정은에게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불안한 분단체제가 한동안 지속되리라는 점이다. ‘핵을 머리에 인 채’라는 불길한 수식어와 함께.
역설적인 건 김정은이 박정희를 닮으려 한다면, 윤석열은 김일성을 닮아가는 점이다. 김정은이 김일성 이래의 통일전선전술을 버린 상황에서 윤석열은 그것을 자기식으로 되살리려 한다. 대북 정보유입을 앞세운 흡수통일론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현 가능성이 낮고, 오히려 상대를 더 단결시키며 전쟁 위험만 높여 자국민을 괴롭힐 뿐이다.
손제민 논설위원 |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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