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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토)

한강이 쏘아 올린 공? 읽고, 쓰고, 공유하는 ‘텍스트힙’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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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언박싱·북톡·책장 투어… 읽는 건 놀이다

호기심? 과시욕? 뭐가됐든 ‘읽는’ 너를 칭찬해

미국의 신경심리학자 매리언 울프는 <책 읽는 뇌>에서 “독서는 뇌가 새로운 것을 배워 스스로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인류의 기적적 발명”이라고 언급했다. 독서가 인간의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는 의미다.

소셜미디어의 쇼츠와 릴스가 뿜어내는 도파민에 반기를 들고 책을 무기로 새로운 독서 문화를 만들어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 중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 신드롬도 이 기류에 강한 힘을 보태고 있다. 읽는 것보다 보는 것에 더 빠르게 반응하는 시대, 텍스트는 어떻게 ‘힙함’의 아이콘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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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의 쇼츠와 릴스가 뿜어내는 도파민에 반기를 들고 책을 무기로 새로운 독서 문화를 만들어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읽는 것보다 보는 것에 더 빠르게 반응하는 시대, 텍스트는 어떻게 ‘힙함’의 아이콘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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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가까이 둔다는 건, 멋지고 ‘섹시한’ 일

직장인 박찬영씨는 오전 6시에 일어나 출근 전까지 1시간 30분가량 책을 읽는다. 점심 식사 후 짧은 여유 시간에도, 잠들기 전과 주말에도 책을 놓지 않는다. 지난 9개월간 섭렵한 책만 187권이다. 이토록 독서를 즐기는 까닭은 “독서를 통해 ‘인생 n회차’ 사는 경험을 할 수 있고 시간적·금전적으로 가장 효율이 좋은 활동이며 독서를 통해 참된 나를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에게 독서는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해요. 책 안에는 등장인물이, 저자가, 연구자가 밟아온 삶의 흔적이 있잖아요.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어서 흥미로워요.”

박씨의 독서는 ‘읽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오후의 도서관(@afternoonlibrary)’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자신이 읽은 책의 서평을 기록한다. 단순히 느낀 점만을 나열하는 글쓰기가 아닌 비판적 시선의 글쓰기를 시도 중이다. 추천 도서나 북카페를 소개하기도 한다.

“책을 좀 덜 권위적으로 바라보면 좋겠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책을 어렵게 생각하더라고요. 영화는 보다가 재미없으면 끄기도 하고, 감독을 욕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책은 안 그래요. 영화는 노는 것, 독서는 공부하는 것이라는 공식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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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모델 카이아 거버(@kaiagerber)는 독서 클럽 ‘라이브러리 사이언스’를 만들면서 “독서는 정말 섹시하다”라고 말했다.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독서는 소수의 특권이자 취미로 여겨져 왔다. 책은 어렵고 고리타분한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팽배했다. 이와 같은 편견이 Z세대를 만나 변화하고 있다. 반갑지만 낯선 이들의 행보에 영국 매체 ‘가디언’은 올 초 “독서는 섹시하다(Reading is sexy)”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세계적인 모델 카이아 거버가 독서 클럽 ‘라이브러리 사이언스’를 만들면서 “독서는 정말 섹시하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기사는 Z세대 사이에서 불고 있는 ‘종이책 읽기 열풍’을 조명하며 지난해 영국 책 판매량이 역대 최고 수준인 6억6900만권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독서의 ‘섹시한’ 매력에 한국의 Z세대들도 매료됐다. 지난 6월 열렸던 국내 최대 규모 책 축제 ‘2024 서울국제도서전’에는 무려 15만명이라는 사상 최대 인파가 다녀갔다. 이들 중 상당수는 2030세대였다. 책을 가까이하는 분위기는 또 다른 수치로도 증명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3년 국민 독서실태’에 따르면 20대의 독서율, 즉 1년에 책을 한 권 이상 읽은 비율은 74.5%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았다.

독서를 통해 도파민을 충족한다는 의미의 신조어 ‘독파민’이나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 세련되고 개성 있다는 뜻의 ‘힙’을 끌어온 용어 ‘텍스트 힙’은 책에 빠진 요즘 세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단어다. 송하백 작가는 이와 같은 트렌드를 두고 “우리나라의 독서 문화와 Z세대가 추구하는 ‘힙’의 요건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며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는 행위이자 ‘인스타그래머블(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한 결과물을 남길 수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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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관련된 콘텐트를 틱톡으로 공유하는 ‘북톡(booktok)’, 인상 깊은 구절을 적어 올리는 책필사, 책장을 정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장 투어(#bookshelftour), 홈 라이브러리(#homelibrary) 등도 소셜미디어를 타고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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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의 늪’에서 가치 찾는 시간으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아날로그 매체인 책을 즐기는 방법은 다채롭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소셜미디어에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표지를 올리거나 독서 중인 모습을 인증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이들은 구매한 책을 ‘언박싱(개봉)’하거나 신작 도서를 요약한 내용의 릴스, 쇼츠, 틱톡 콘텐츠를 제작한다. 독서를 단순한 취미에서 공유하는 문화로 발전시킨 것이다.

때때로 독서는 자신의 취향이나 가치관을 드러내는 수단이자 소통의 도구로 사용된다. 이들은 인상 깊었던 구절에 줄 긋기, 필사하기 등으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 비슷한 맥락에서 서평이나 독후감 등 책과 관련된 콘텐츠를 틱톡에 올리고 해시태그를 달아 공유하는 ‘북톡(booktok)’ 또한 인기다. ‘읽는 것’보다 ‘읽은 과정’에 집중하는 셈이다. 책장을 정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장 투어(#bookshelftour), 홈 라이브러리(#homelibrary) 콘텐츠도 북톡에서 확장된 키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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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폼 등 자극적인 영상에 대한 반감으로 책을 가까이 하게 된 이들도 늘어나는 분위기다. 정지윤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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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대학생 조윤주씨는 ‘한 달에 30권, 1년에 300권 책 읽기’를 실천 중이다. 그가 책을 가까이하게 된 계기는 쇼트폼 등 자극적인 영상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잠들기 전 ‘5분만’으로 보기 시작한 영상에 빠져들어 밤을 지새우기를 반복하며 자괴감이 들었던 그는 임시방편으로 책을 들었고 그 속에서 답을 찾았다.

“몇 번을 반복해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긴 호흡의 문장에 숨이 턱턱 막히던 순간들도 있었어요. 독서가 일상으로 파고들려면 습관적인 행위로 인식돼야 하는데 초등학교 이후 진득하게 책을 읽어본 기억이 없더라고요. 읽는 시간을 따로 내야 하고, 완독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책을 멀리하게 했던 것 같아요. 문해력을 강조하지만 정작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교육 시스템도 문제고요.”

조씨는 ‘허무함만 남는 영상의 늪에 중독될 것인가, 하루하루 쌓이는 시간 속에서 가치를 찾아낼 것인가’의 선택은 각자의 몫이라고 말한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독서가 얼마나 멋진 일인지 그 진가를 발견하는 이들이 늘어났으면 한다는 바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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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세대의 독서 활동은 오프라인에서도 이어진다. 이들은 북 팝업스토어, 지자체의 공공도서관을 활용하거나 커피나 술을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북카페나 ‘책바’ ‘책맥펍’을 찾아다니며 재미를 좇는다. 북바(bookbar) ‘드렁큰정글(@drunken.jungle)’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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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향한 열망, 빅백 등 패션업계로 확산

Z세대의 독서 활동은 오프라인에서도 이어진다. 이들은 북 팝업스토어, 지자체의 공공도서관을 활용하거나 커피나 술을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북카페나 ‘책바’ ‘책맥펍’을 찾아다니며 재미를 좇는다.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건형 문학평론가가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드렁큰 정글’도 그중 하나다. 이곳은 ‘따뜻한 마음(정)’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함께 ‘글’을 읽고 쓰는 공간을 표방한다. 책마다 짤막하게 적힌 ‘추천의 이유’도 흥미를 더한다.

고전적인 방법인 독서 모임으로 책을 소화하는 이들도 있다. 회원 10만명이 활동 중인 독서 모임 커뮤니티 ‘트레바리’는 한 달 6만원 남짓의 회비를 내는 유료 모임인데도 순식간에 모집이 마감되는 분위기다. 이곳의 회원인 박은정씨는 “어느 정도의 강제성이 있어야 책을 읽을 것 같았다”며 “내 또래의 사람들을 보면 토론이나 논쟁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다양한 사고를 마주하게 된다는 점도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텍스트를 향한 열망은 종이책의 영역을 넘어섰다. 패션 월간지 더블유 코리아(W)는 “어디를 가나 책 한 권을 팔에 끼고 다니던 낭만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화려하고 장난감 같던 미니 백들 대신 책 몇 권은 넉넉히 들어갈 심플한 빅백들의 유행이 이를 뒷받침해준다”며 패션업계에 불어온 ‘텍스트 힙’의 분위기를 전했다. 호황을 맞은 전자책 업계도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활용해 사람들과 소통하거나 AI 기술을 활용한 독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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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아이돌 그룹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이 유튜브 방송 <살롱드립2>에 출연해 언급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올해 상반기 교보문고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1위(교보문고 2024 상반기 결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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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힙이 ‘힙’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인플루언서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요즘 세대는 인플루언서의 겉모습뿐 아니라 가치관, 라이프스타일을 추종한다. 좋아하는 아이돌 혹은 인플루언서가 읽고 있는 책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유다. 실제로 지난 5월, 아이돌 그룹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이 유튜브 방송 <살롱드립2>에 출연해 “사람들은 마흔에 읽지만 나는 스무 살에 읽고 싶었다. 쇼펜하우어가 워낙 염세적이어서 위로받게 된다”고 말한 이후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판매량이 급증하며 올해 상반기 교보문고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1위(교보문고 2024 상반기 결산)에 올랐다.

최규연 독서 지도사는 ‘트렌드 힙’을 “모두가 책을 읽지 않는 시대 빛을 발한 독서의 희소성, 팬덤에 따른 디토 소비, 지적 호기심과 자기 과시 욕구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트렌드”라고 정의한다. 최씨는 “힙하다는 말은 희소성에서 출발한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 종이책은 낯설면서도 신비한 존재”라면서 “영상을 보는 시간이 책을 읽는 시간보다 긴 이들에게 독서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취미’로 포장됐고 ‘있어 보이는’ 효과까지 줄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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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작품들이 진열된 판매대에 소설 <소년이 온다>의 일시품절 안내문구가 적혀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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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신드롬, 새로운 독서문화 초석으로

일상이어야 할 독서가 ‘트렌드’가 됐다는 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책과 멀리 살았나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갑작스럽게 ‘힙’해진 책 읽기에 대한 시선은 엇갈린다. ‘과시욕만 앞선 유행’이라는 날 선 비판도 적지 않다.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도서관 투어를 떠나는 조미란씨는 “평일 오후 지하철 2호선을 탔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더라”라면서 “취미를 물으면 열의 아홉은 독서라고 대답하는 나라인데 참 아이러니한 풍경이라 생각했다”고 꼬집었다.

단순한 독서를 넘어 고민이 더해져야 한다는 조언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책은 오래전부터 지적 과시를 위한 도구였다”며 “귀족들이 고급 서재를 갖추고 책을 들고 다니는 것 또한 자신의 지적 수준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는 전제를 들었다. 여기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때와 다르게 어려운 책보다 가벼운 책이 과시재로 쓰인다는 것”이라며 “몰입도 높은, 나아가 깊이 있는 독서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곁에 두는 문화가 유행한다는 것은 환영하고 칭찬해야 할 일”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황석영 작가는 최근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작은 아령부터 시작해 근육을 키워나가는 것처럼 독서력도 일단 책을 읽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역시 “소셜미디어에 좋은 문장을 올리는 것은 ‘공유의 욕구’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책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는 점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라면서 “다만 한강 신드롬을 비롯해 텍스트를 향한 인기가 다양한 장르의 도서로 이어지는 견인 효과가 나오길 바라본다”고 희망했다.

김지윤 기자 ju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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