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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 (금)

[유석재의 돌발史전] 천자문은 과연 고리타분한 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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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이 낸 '천자문'의 표지(왼쪽)와 본문.


서점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한강의 소설 뿐이 아닙니다. 여전히 어린 학생들의 한자 교재로 선호되는 책이 ‘천자문(千字文)’입니다. 비록 만화로 변형이 된 것이지만 말이죠.

남북조시대인 양(梁)나라 무제(武帝)때 주흥사(周興嗣)란 인물이 전부터 내려온 글들을 편집했다는 이 책은, 4글자씩 모두 250구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사실 무척 어렵습니다. 하늘이 검고 땅이 누렇다는 얘기를 도대체 왜 하는 것일까요?

오래 전 천자문에 관한 책 두 권이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적이 있었습니다. 김근 서강대 명예교수의 ‘욕망하는 천자문’과 작가 김성동(1937~2022)씨의 ‘김성동 천자문’이었습니다. 두 책 모두 “천자문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고 말합니다. 전자가 학문적 상상력을 통해 숨은 권력의 의미를 추구하는 책이라면, 후자는 쉽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구절의 뜻을 조용히 생각하게 합니다.

‘욕망하는 천자문’의 김근 교수는 “우리는 지금도 ‘천자문’의 영향력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천 년 넘게 초학자를 대상으로 한 기초학습서였고, 그 힘은 아직도 우리 전통문화에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가 5년에 걸쳐 집필한 이 책은 ‘천자문’에 대한 새로운 주석서다.

‘욕망한다’는 개념은 우리말로는 어색할 수도 있지만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에서 따 온 것입니다. 타자(他者), 즉 텍스트의 욕망에 의해 주체는 변화를 겪게 되며, ‘천자문’이라는 텍스트 역시 읽는 사람이 무의식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 ‘욕망’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권력과 지배담론을 향한 숨겨진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즉 책 속에 숨어있는 주류 질서의 이데올로기를 파헤치는 것인데, 예를 들어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문장을 보면 결코 대등하지 않고 남자 쪽에 특권이 부여된 질서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부(夫)’는 비녀 하나로 남자임이 지시되듯 질박함이 본질인 것처럼 묘사돼 있는 반면, ‘부(婦)’는 복잡하게 수식함으로써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런 식으로 ‘천자문’의 글자들을 4자씩 나눠 모두 250꼭지의 연구를 통해 그 실체를 좇았습니다. 자형 분석을 통해 의미를 추적하고, 다양한 맥락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읽기를 시도했습니다. 문학비평가 우찬제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자유로이 노니는 곤어(鯤魚)의 형상처럼 신천지를 열어보이는 격”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첫 장 ‘천지현황(天地玄黃)’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품었을 의문을 거침없이 쏟아붓습니다. “아무리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둘러봗도 하늘은 검지 않고 땅은 누렇지 않다!” ‘현(玄)’은 구체적인 색깔이 아니라 그윽하고 아득한 ‘현허(玄虛)’라는 속성을 표현한 것이고, ‘황(黃)’은 형이상학적 오행(五行)사상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우주홍황(宇宙洪荒)’에서는 ‘넓고 거친 우주에는 서사(敍事)가 없다’는 의미를 끄집어냅니다.

그러나 그 결론은 결코 텍스트에 대한 비난이 아닙니다. 김 교수는 집필 과정에서 오히려 그 탁월함에 점점 사로잡히게 됐다고 고백합니다. “저자들의 의도인 체제유지의 이데올로기를 모두 건져내더라도, 결코 벗어버릴 수 없는 근본적인 지혜는 여전히 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일각에선 지나치게 견강부회적인 해석이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 얽매이지 않는 분방함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가 김성동의 ‘김성동 천자문’은 천자문을 8글자씩 모두 125꼭지로 해설했습니다. 우선 앞 책과 비교하면 매우 친절한 면이 있습니다. 저자가 페이지마다 직접 쓴 붓글씨와 함께 많은 해설과 도판이 실려 있고,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장으로 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벗을 사귀는 데는 정분을 함께 나눠야 한다’는 뜻인 ‘교우투분(交友投分)’의 해설을 보면 이렇습니다. 조직폭력배나 이른바 ‘가신(家臣)’ ‘집사(執事)’들의 ‘의리’는 참된 사귐이 아니라는 것이죠. “잇속 패거리의 따논자리를 지켜내기 위한 계염에 지나지 않는데, 모둠살이의 보탬보다는 패거리의 알속이 먼저이고 나라와 겨레의 보탬보다도 패거리 모임의 일속이 더 먼저이기 때문”이라고 일갈합니다.

글의 시점은 철저히 ‘현재’입니다. 원저자의 의도에 대한 천착이나 글자의 해독 같은 것은 둘째 문제가 됩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문체가 마치 판소리를 듣는 듯한 지극한 우리말투라는 것입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를 발표했던 저자 김성동씨는 유학자인 조부의 무릎에 앉아 ‘천자문’을 배웠다는 ‘한학(漢學)의 직접 세례를 받은 마지막 세대’라고 합니다.

김씨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제왕의 길과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행정가의 올바른 몸가짐, 그리고 바람직한 인간형인 군자의 길에서 식구와 이웃 사이에 지켜져야 할 예의범절에 이르기까지 두루 담겨 있다.” ‘천자문’이 구닥다리 책이 아니라 세상사의 필수교양임을 그는 참으로 재미나게 풀어보입니다.

‘조민벌죄(弔民伐罪) 주발은탕(周發殷湯)’의 해설에서 저자는 하(夏)·은(殷)을 ‘동이족(東夷族)이 중원(中原)에 세운 나라’로 여기고, ‘조민벌죄’는 어디까지나 동이를 몰아낸 한족(漢族)인 주(周)나라가 내세운 명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제가 이런 역사 해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이어 큰 해설 본론에선 ‘고구려’를 짚어냅니다.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에 그렇게도 민감한 것은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분리독립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며,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만든 일 때문에 자칫 “역사를 모르는 민족을 낳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쉽게 읽힌다’는 게 언제나 미덕은 아닙니다. 또 앞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어디까지나 각각 ‘천자문’에 대한 하나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원저가 주는 진정한 깨우침은 독자 자신이 발견하는 것이니까 말이죠. 결국 이 책들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보조해주는 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 대학에서 교수가 ‘조인식(調印式)’에 관한 내용을 가르쳤을 때 강의를 듣던 학생 절반이 ‘조인’을 ‘조인(join)’으로 알았다고 합니다. 어느 대학 사학과에선 몇 년 전 “선생님, 북경(北京)하고 베이징하고 얼마나 멀어요?”라는 한 학생의 질문에 분노한 교수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를 다시 한번 읽고 오기 리포트를 내 줬다고도 합니다.

한편으로 한글전용론자들은 ‘한글만 써도 다 알아듣는데 뭘 하자는 거냐’며 한자사용을 군국주의의 망령인 양 두려워합니다. 전통문화유산의 대부분이 한자와 한문으로 돼 있다거니,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대부분이 한자어라느니, 이런 말을 아무리 되풀이해 봐야 식상할 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大韓民國’을 그저 ‘대한민국’이라 쓰고, ‘太極旗’를 그냥 ‘태극기’라고 쓰면 그걸로 자의(字義)가 스스로 명백해지는 것인가요? 좀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이나 ‘태극기’란 그저 발음기호에 불과할 뿐, 원래 한자어의 의미는 그 글자 속에 그대로 숨어있다는 사실을 왜 외면하려 하는 것인가요?

“한자를 모르니까 중국이나 일본과 비즈니스를 하는 데 걸림돌이 되잖아!”라 투덜거리는 일부 기업 측의 태도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비즈니스 만찬장에서 포스트잇 꺼내들고 필담이라도 할 요량인가요? 왜 우리가 일상적으로 늘 쓰고 있지만 순전히 어렵다는 이유로굳이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것에 겁을 먹고 있는 한자를, 이제 동북아시대 비즈니스에 불편하다고 그 필요성을 뒤늦게 찾아내는 것인가요?

그건 자기가 뭘 모르는지도 정말로 모르는 세대들에 의해 이미 기력이 쇠진해진 한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애인’과 ‘휴계실’과 ‘주위 환기’와 ‘다님선생’과 ‘실레화’와 ‘찹찹(錯雜의 오기)’과 ‘상막(索莫의 오기)’이 난무하는 현실이 아무리 기막히다 해도 “어차피 국어는 사용자의 실제 발음을 토대로 변화하는 것”이니까 그대로 인정해줄 대상이 되는 것입니까?

‘천자문’은 일견 고리타분해 보이는 옛날 책이지만 새롭게 해석한다면 고리타분할 것도 하나 없을지도 모릅니다. 만화를 보고서라도 어린 세대가 한자를 익혀 우리말의 속뜻을 깨달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일 것이지만, 그것이 ‘천자문’이 지닌 본래의 철학적 함의를 얼마나 전달할지는 의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한자를 전혀 모른 채 우리말과 우리글을 쓰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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