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24 (목)

[중앙시평] 아내 가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앙일보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아내 가뭄』은 호주 정치평론가가 쓴 책 제목이다. 저자는 성평등을 논할 때 임금 격차나 승진기회 등 일터에서 일어나는 일과 가사노동을 통합해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남녀 최고경영자를 비교한 호주의 연구에서 남성의 절대다수는 전업주부 부인이 있었으나, 여성 중 남편이 가사를 전담하는 경우는 없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사노동 부담이 다른 후보들 간의 경쟁에서는 ‘직업에 쓸 수 있는 가용 시간과 에너지’가 절대적으로 적게 주어진 사람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원한다면 결국 사회는 아내 가뭄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가사돌봄 노동에서 심한 불균형

글로벌 스탠더드와도 동떨어져

여성의 문제는 남녀 모두의 문제

모든 부처에서 다면적 실천 필요

인구가 고령화되면서 자녀뿐 아니라 노인의 돌봄도 누구에게나 닥친 문제다. 다만 현재는 이 문제가 여성에게 과중하게 부담 지워지고 있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은 가사노동 참여의 성별 불균형이 일본과 튀르키예 다음으로 가장 심하다. 2021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에서도 맞벌이 여성의 경우 남성의 2배, 특히 12세 이하 자녀가 있는 경우 3배를 돌봄 노동에 할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통적인 성역할 고정관념은 20·30대를 중심으로 상당히 완화되었지만, 인식과 실천 사이엔 아직도 괴리가 크다.

중장년 세대에 남아있는 차별적인 인식과 그 결과 나타나는 무신경도 우리가 좀 더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외교 무대에서 지난 8월 말 있었던 사건도 아직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통일부가 조직하는 국제행사인 국제한반도포럼 참여 연사의 남녀 성비 구성이 20:1인 채로 공지가 나가자 영국대사가 시대착오적인 ‘매널(man과 panel의 합성어로, 온통 남성만 있는 행사를 뜻함)’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결국 황급히 행사를 며칠 앞두고 여성을 더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올해 여성 임금근로자 수는 1000만 명을 돌파했지만 남녀 임금 격차는 OECD 회원국 중 최고수준이다. 혹자는 남성이 근로시간이 길고 초과근무도 많고, 남성이 잘하는 직종의 임금이 높은 것이기에 격차로 나타나는 결과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왜 남성이 근로시간이 더 길 수 있고 초과근무도 더 많이 할 수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근속근무가 임금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이상, 남성이든 여성이든 경력단절을 겪는 사람의 임금은 낮지 않을 도리가 없다. KDI 보고서의 추산에 따르면 유자녀 여성의 경우 출산 이후 경제활동참가율이 낮아짐에 따라 장기적으로 소득이 66%가량 감소하지만, 유자녀 남성의 경우 출산 이후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기업의 여성 CEO의 비율은 언급할 만한 숫자도 되지 않으며, 넓혀서 100대 그룹의 임원 비율을 보더라도 고작 6%이다. 사외이사는 어떤가? 자본시장법은 자산 2조원 이상 상장 대기업에만 여성을 한 명 이상 포함하게끔 정하고 있다. 왜 2조원 이상만이어야 하는지, 왜 1명만 있으면 다양성을 충족하는지 근거를 찾기 어렵다. 국제사회는 다양성의 기치를 들고 있는데 아무리 느슨한 잣대를 대어도 한국은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여성할당’ ‘여성기업 지원’ 등 제도들은 꽤 많이 생겼다. 대기업에 국한되기는 하나 육아휴직제도도 많이 좋아졌다. 물론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러한 지원 정책이나 제도가 여성을 고려한다는 사실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만, 차별적인 고정관념이나 가사노동 불균형 등은 드러나지 않고 묻힌다. 아직 갈 길은 먼데 역차별 논란이 일어나는 이유 중 하나다. 육아휴직도 사실은 부모 모두를 위한 제도지만 여성만을 위한 제도라고 생각하기 쉽다. 여성을 지원한다는 의미로 ‘맘(Mom)’ 자를 붙인 각종 일·가정 양립 제도도 의도는 좋지만 ‘여성’을 앞세울수록 오히려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역기능을 하기도 한다.

저출생 현상은 극심한 ‘아내’ 가뭄이다. 지금 여성의 문제를 함께 공론화하고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고령사회를 대비하는 길이기도 하고, 일·생활 양립을 위해 나아갈 길이기도 하다. 주업무를 담당해 오던 여성가족부는 개점폐업 상태다. 여성가족부라는 하나의 부처 대신 더 적극적으로 모든 부처에 여성가족정책 담당실이나 담당국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차별을 더 드러내고 인식과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처가 각자의 영역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학교와 가정의 연락이 여전히 엄마에게만 집중하는 것은 아닌지, 공공시설에 충분한 여자 화장실이 있는지, 남성 전업주부나 육아휴직자들의 고충은 무엇인지, 여성 창업자들이 남성중심의 금융업으로부터 투자 조달에 어려움은 없는지, 여성 질병에 대한 연구가 턱없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교육부·행정안전부·금융위원회·질병청 할 것 없이 구석구석 다면적인 실천이 필요한 시점이다. 돌봄과 가사노동의 가치에 대한 인식도 높여야 한다. 해묵은 문제 해결을 위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을 상기해볼 시점이다.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