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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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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별세…MB "정치선임 형이 많은 조언"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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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23일 오전 89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기관지 관련 질환으로 병원 입ㆍ퇴원을 반복하다 이틀 전 건강이 악화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이날 빈소를 찾은 동생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정치 선임’인 형으로부터 많은 조언을 받았다”며 “정치라는 게 도전하고 힘 있게 하기보다는 겸손하게, 또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서 한다는 생각을 갖고 하면 좋겠다고 충고했고, 나도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천국에 가서 우리 옛날 어렵게 살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기쁘게 서로 만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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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이 23일 오후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친형인 고(故) 이상득 전 의원 빈소 앞에서 취재진과 인터뷰를 앞두고 눈물을 훔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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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부의장이 별세한 이날 그의 고향인 경북 포항시 흥해읍 덕실마을에선 고인의 공적비 제막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제막식을 준비한 이상휘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중앙일보 통화에서 “이틀 전 이 전 부의장께서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제막식을 연기했다.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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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장리 덕실마을 경주이씨 재실 '이상재' 앞에 설치된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공적비. 이 전 부의장의 정치 활동을 도운 인사나 문중 인사 100여명은 돈을 모아 이 공적비를 세웠다. 애초 공적비 제막식은 9월 23일 열릴 계획이었으나 이 전 부의장 건강 문제로 이달 23일로 연기됐다가 별세로 다시 연기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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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고인은 포항 동지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 코오롱 1기 신입 공채사원으로 입사해 코오롱ㆍ코오롱상사 대표이사직에 올랐다. 동생 이명박 전 대통령과 더불어 가난을 뚫고 일어선 입지전적 성공담에 ‘샐러리맨 신화’ ‘흙수저 신화’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1988년 정계 입문한 이후부터 고인의 삶은 영욕의 세월이었다. 민정당 소속으로 13대 국회에 첫 입성한 이후 2008년 18대 국회까지 내리 6선 했다. 이 사이 국회부의장을 비롯해 한나라당 최고위원ㆍ원내총무ㆍ사무총장ㆍ정책위의장 등 주요 직책을 두루 지냈다.

그의 활약은 여야를 아울렀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당시 야당 원내총무로 국회 재경위원장을 겸임하던 그는 ‘금융개혁 13개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는 김대중 당선인의 부탁에 협조했다.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해 협조하자”는 고인의 눈물 호소에 야당 의원들의 마음이 돌아섰고, 그는 ‘미스터 위기관리’란 별명도 얻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후폭풍으로 당이 위기에 몰렸을 때는 사무총장으로서 천막당사를 짓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보수 정당 재건을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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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빈소가 마련돼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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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진영 복판에 선 ‘형님’의 존재는 동생 MB의 대선 도전에도 큰 힘이 됐다. 고인은 그간 쌓아 올린 정치 경륜과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친이명박계(친이계)를 친박근혜계와 대등한 세력으로 키워냈다. 2007년 대선에서 MB당선에 주요 역할을 한 후견 그룹 ‘6인회’를 조직하고 이끈 것도 고인이었다.

이런 탓에 MB 당선 뒤 고인은 ‘상왕’으로 불렸다. 모든 일은 형님으로 통한다는 뜻의 ‘만사형통(萬事兄通)’, 고향 이름을 딴 ‘영일대군’ 등의 부정적 수식어도 따라붙었다. 자신의 지역구인 포항에 SOC(사회간접자본) 예산이 집중적으로 배정되자 ‘형님예산’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등 질시와 견제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고인을 잘 아는 인사들의 증언은 이런 세간의 평가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외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했고, MB 당선 뒤엔 쓴소리를 마다치 않았다고 한다. 이 전 부의장의 보좌관을 오래 지낸 박영준 전 차관은 통화에서 “청계천 복원 뒤 포항 사람 수만 명이 상경했는데, 단 한 번도 서울시청에 같이 들어간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MB 정부 인수위 당시 고인의 장다사로 비서실장이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발탁됐다”며 “내가 당선인 총괄팀장이 된 이후 한 번도 연락이 없던 이 전 부의장이 그제야 처음으로 전화해 ‘니는 내 비서실장을 빼가면서 전화 한통 안 하냐’고 말할 정도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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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국회의장이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동생이 대통령이 되며 이룰 수 없는 꿈이 됐다. 강석호 자유총연맹 총재는 “고인이 당시 ‘나는 명박이 덕에 국회의원 하는 게 아닌데, 내보고 그만두라는 게 맞나’라며 억울해했다”고 기억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 앞서 고인의 불출마를 요구하는 당내 소장파 ‘55인 파동’ 곡절에도, 이 전 부의장이 출마를 강행해 6선 고지에 오른 배경이다. 하지만 여권 권력투쟁 논란 끝에 그는 2009년 6월 결국 정치 2선 후퇴를 선언하며 국회의장 꿈을 접었다.

이후 한동안은 남미와 아프리카 등을 오가며 자원외교에 주력했다. 2011년 출간한 ‘자원을 경영하라’에서 그는 “누가 들추어도 한 점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국가에 어떤 이득이 되느냐고 캐물어도 자신 있게 반론할 수 있는 성과를 끌어내겠다고 작정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2010년 국가정보원 직원 추방사건으로 촉발된 리비아와의 외교 갈등 해결에 나섰던 일, 리튬 개발 협의를 위해 볼리비아를 다섯 차례나 방문한 일 등이 고인이 꼽은 핵심 성과다.

이후의 삶은 내리막길이었다. 19대 총선 불출마 뒤 저축은행에서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기소 돼 1년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현직 대통령 친형이 구속된 첫 사례로, 당시 MB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2013년 만기 출소했지만, 6년 뒤 포스코그룹 민원 해결 대가로 뇌물을 받은 혐의로 또다시 1년 3개월 실형을 선고받아 수감됐다.

잇따른 검찰 수사와 옥고로 몇해 전부터 한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였다고 한다. 지난여름 고인과 식사한 경북 출신 정치인은 “기관지가 약한 탓에 기침을 계속하면서도 나라 걱정을 잊지 않았다”며 “이후 외부활동을 거의 못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장례는 4일간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6일 오전 5시 40분이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최신자씨와 자녀 지형ㆍ성은ㆍ지은씨, 며느리 조재희씨, 사위 구본천ㆍ오정석씨가 있다.



김기정·강보현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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