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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목)

'장애인 시설 미비' 국가가 배상해야 할까…대법 공개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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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23일 '장애인 접근권 국가배상소송'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이 진행됐다. 장애인 접근권을 보장하지 않은 시행령을 20년 넘게 개정하지 않은 국가의 행위가 위법인지, 손해배상을 책임이 성립하는지 등이 쟁점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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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약 90평) 미만의 가게는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면제했던 정부의 시행령이 위법인지, 위법이라면 국가의 손해배상이 이뤄져야 하는지 대법원 공개 변론이 열렸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전원이 참석하는 전원합의체 변론은 3년 만으로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후 처음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지체장애인 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차별구제 소송의 공개 변론을 23일 오후 2시 대법정에서 열었다.

이번 소송의 쟁점은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과도하게 축소 규정된 시행령을 국가가 개정하지 않아 장애인 접근권을 침해했는지, 국가의 부작위(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가 위법에 해당하는지, 나아가 손해배상 책임까지 성립하는지 여부다.

1998년부터 2022년까지 20년 넘게 유지된 과거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은 식당·약국·편의점 등 소매점 중 바닥면적 합계 300㎡ 이상에서만 장애인 시설을 설치할 의무를 부여했다. 이에 따라 약 90평 미만 점포 대다수가 경사로와 호출벨 등 장애인 시설을 설치하지 않았다.

특히 300㎡를 넘는 편의점은 전국 편의점의 3%에 불과해 장애인들은 사실상 접근권이 박탈된 상태였다. 정부는 2022년 4월 '50㎡ 이상 의무 설치'로 조건을 강화했다.

이날 변론에서 원고 측은 "일반적인 시행령 개정에 5~7개월이 걸리는데 해당 시행령 개정은 24년이 걸렸다"며 "장애인 편의라는 입법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헌법상 기본권에 해당하는 접근권을 가로막았다"고 주장했다. 바닥면적 300㎡ 이상인 소매점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애초부터 현실과 동떨어진 규정이었는데 개선이 너무 늦었다는 취지다.

휠체어를 탄 채 원고 측 참고인으로 출석한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는 "저는 아직도 (휠체어가 진입 가능한) 음식점을 찾아다닌다. 얼마 전 점심을 먹으려고 30분을 헤매다 한 곳도 발견하지 못해 밥을 굶었고, 또 며칠 전에는 지인과 카페를 가려고 1시간 동안 찾지 못해 길에서 얘기하고 헤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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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공개변론에 앞서 장애인 단체가 국가의 배상 책임을 주장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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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피고(정부) 측은 "이 사건 쟁점 규정과 관련해 구체적인 행정입법 부작위와 위법성, 고의나 과실이 인정되기 어렵다"면서 지체장애인에게 온라인 구매 등 대체 수단이 마련돼 있다고 반박했다. 피고 측이 부른 참고인 안성준 한국장애인개발원 팀장도 "정부는 꾸준히 장애인 복지 정책을 운영해왔다"며 "공공시설 장애인 시설 설치율이 1998년 47.4%에서 2023년 89.2%로 높아졌다"고 밝혔다.

대법관들은 이어진 질의 응답에서 정부 측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오경미 대법관은 "20여년간 이런 상태가 유지됐다는 것은 작은 점포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뜻 아닌가. 그걸 (온라인으로) 쉽게 대체되는 권리라고 말하는 데 놀랐다"면서 "소매점에 대한 권리가 활동지원이나 온라인 활동으로 대체가 가능한 권리로 치환될 수는 없다"고 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300㎡ 이상 시설이 전국에 얼마나 되는지 양쪽에 물었다. 원고 쪽은 약 3%, 정부 쪽은 5%는 넘는다고 답했다. 이에 조 대법원장은 "법은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하라고 했는데 정부 주장대로 해도 5% 접근성을 두고 '우리가 할 바를 다했다'고 하는 건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이 정도라면 입법 의무를 게을리한 것이 숫자 자체로 명백한 것이 아닌가"라며 직접적인 의견을 내기도 했다.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두고도 입장이 극명하게 나뉘었다. 원고 측은 "1인당 100만원, 그보다 적은 10만원이라도 손해배상이 인정돼야 한다"며 "국가재정 문제로 배상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정부 측은 장애인 접근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침해됐는지 불분명하고 관련 제도를 유지·개선하는 과정에서 공무원들의 과실이 없다는 주장을 폈다.

앞서 대한변호사협회와 한국사회보장법학회는 국가의 배상책임이 인정된다고 서면 의견을 냈다. 반면 1심과 2심은 "편의점 등이 장애인 시설을 설치해야 한다"면서도 국가배상 책임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최종 선고는 변론 종결 이후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의 토론을 거쳐 2~4개월 내에 이뤄질 전망이다.

김철웅 기자 kim.chulwo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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