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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수)

[일사일언] 노인도 때론 아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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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시장 어귀의 어느 떡볶이집에서 한 할머니에게 딸뻘로 보이는 여성이 짜증을 내고 있었다. “아이고 그만 먹어요, 그렇게 먹고 또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하려구 그래요.” 할머니가 어묵과 떡볶이를 더 먹으려 하자 구박하는 장면. 딸인지 간병인인지 요양보호사인지 알 수는 없었다.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는 주눅이 잔뜩 들었다. 나의 엄마를 비롯해 이 땅의 수많은 부모님이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영원히 어른다운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 생애 발달’에 대해 연구한 심리학자 에릭슨에 따르면, 노년기를 넘어서면서 어느 순간 우리의 뇌는 발달의 일면이 꺾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갑자기 아이처럼 영문도 모르게 떼를 쓰기도 한다. 초고령화 사회에선 이를 담담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럴 때 중요한 게 ‘정서적 돌봄’이다.

얼마 전 경기도 용인의 한 요양원을 방문했다. ‘정서 세러피’를 위해서였다. 어떤 내용으로 어르신들을 만날까 고민하다 ‘고향’ ‘엄마’ ‘음식’이라는 주제로 가닥을 잡았다. 고향 하면 생각나는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너도나도 신이 나 하셨다. 뇌 발달에서 노년기에는 최근 것보다 오래된 기억, 의식적이면서 명시적 기억보다 오래 익어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기억이 더 생생하다. 당신들은 의식하지 못하시더라도 내재화하신 ‘암묵 기억’이 위로를 주는 것이다.

사이다 작가의 ‘고구마구마’를 읽어 준 뒤 “맛있구마” “길쭉하구마” “탔구마” 같은 단어를 연결하며 함께 마실 음료로 뭐가 생각나는지 물었다. ‘동치미’를 소환한 한 할머니는 동치미 만드는 것을 신나게 설명하셨다. 우리 모두 동치미 몇 통을 상상 속에서 담갔다. 서로서로 “우리 엄마 동치미가 최고였다”고 ‘비법’을 나누시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씀하신다. “엄마 보고 싶다.” 그러고는 누군가 말을 잇는다. “이제 곧 엄마를 만나러 갈 거다”.

대한민국이 이만큼 살 수 있도록 애써 오신 그분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우리는 어르신들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그분들 마음에 응어리진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찬찬히 들어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잘 알지 못한다고, 내 속도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몰아세우고 애처럼 혼내야 할 권리가 우리에게 과연 있는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되었듯, 그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꿈이 모여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루어냈을 테니 말이다.

[김영아 그림책심리성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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