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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 (화)

[길 잃은 발행어음]③ 신용도 낮은 기업 투자 못하게 막아놓은 증권사도... 은행과 경계 흐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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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형 증권사는 크게 ‘종합투자금융회사(종투사)’와 ‘종투사이면서 초대형 투자은행(IB)’인 회사로 나뉜다. 종투사는 증권사가 자기자본의 2배까지 기업에 대출해 줄 수 있고 초대형 IB는 여기에 어음까지 발행할 수 있다. 종투사 시스템이 도입된 지 10년이 넘은 가운데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최근 이 제도를 손보겠다고 밝혔다. 성장성이 있는 기업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자본을 공급하라는 게 애초 도입 취지였는데, 증권사들이 편안히 앉아서 부동산 대출 등으로 과실만 취하고 있다고 판단해서다. 취임한 지 석 달이 안 된 새내기 금융위원장이 지적한 이 제도, 그중에서도 규제가 대폭 완화된 초대형 IB 사업자들의 실상을 짚어봤다. [편집자 주]

‘모험자본 공급’과 ‘고객 자금 안전 상환’. 초대형 투자은행(IB)이 발행어음 사업을 하면서 지켜야 할 2가지 가치지만, 둘 다 잡기는 쉽지 않다. 모험자본을 공급하기 위해 투자 위험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혁신 기업에 투자하다 보면 자연스레 고객 자금을 돌려주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발행어음은 ‘운용의 묘’를 발휘해야 하는 영역이라, 정부는 어음을 발행할 수 있는 요건을 엄격하게 잡았다. 현재 60개 증권사 중에서 4곳(미래에셋·한국투자·NH투자·KB증권)의 초대형 투자은행(IB)만 발행어음이 허용됐다.

그러나 4곳의 초대형 IB라고 해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고객 자금 안전 상환이라는 후자에 집중하고 있다. 증권사 중 일부는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을 신용도가 낮은 기업에 투자하는 것을 원천 금지해놓은 곳도 있다.

조선비즈

KB증권의 2024년 전략별 Book(북) 한도 배정안. 발행어음 부문에서 채무증권 중 신용등급이 BB+이하, 내부 분류상 대출은 B+ 이하에 대해 '편입 금지' 문구가 적혀있다./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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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KB증권의 ‘2024년 전략별 Book(북) 한도 배정’에 따르면 이 회사는 발행어음 부문에서 채무증권 중 신용등급 BB+이하는 편입을 금지했다. 발행어음을 통해 조달한 자금으로 해당 등급 채권에는 투자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BB+ 이하는 채무불이행 위험 가능성이 있어서 발행어음 사업을 하는 모든 증권사가 선호하지 않는 자산이긴 하나, 아예 지침에 편입 금지라고 못 박아둔 건 KB증권이 유일했다. 대출에서도 KB증권은 내부 기준상 B+ 이하로 분류되는 건은 편입하지 않기로 했다.

KB증권 관계자는 “발행어음 운용자산의 편입 가능 최저등급을 정한 이유는 최소한의 자산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라며 “(2019년) 단기금융업 인가 이후 비즈니스 안정화 단계에 진입하면서 (모험자본 공급을) 점진적으로 늘려가는 과정에 있다”고 밝혔다.

금융위원회가 당초 자기자본 4조원 이상인 초대형 IB에 어음 발행을 허락해 준 목적인 모험자본 공급에서 KB증권이 가장 소극적인 증권사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정확한 분류 체계는 없지만, 자산의 만기가 길수록 또 투자 대상 회사의 사회적 신용도가 낮을수록 모험자본으로 분류된다.

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은행과 달리 위험을 감수하고 수익률을 추구하는 게 증권사의 역할”이라며 “고객의 자산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나, 요즘엔 증권사와 은행의 구분이 흐려지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타 증권사들은 채무불이행 위험이 있는 자산에 대해 ‘편입 제한’이 아닌 ‘비중 제한’을 선택했다. NH투자증권은 신용 등급별로 편입 한도 금액을 정했다. ▲1등급(국고채, 통안채, 특수채, AA- 이상) 4조원 ▲2등급(A0, A+) 1조3000억원 ▲3등급(A-~BBB0) 4000억원 ▲4등급(BBB- 이하) 2600억원 등이다. BB+ 이하 채권도 NH투자증권은 규정상 투자할 수 있게 열어뒀다.

미래에셋증권도 비슷하다. 이 회사는 발행사별로 액수 제한을 뒀다. 미래에셋증권의 ‘리스크관리 운영방안’에 따르면 ▲AAA~AA0 2500억원 ▲AA-~A+ 1500억원 ▲A0~A- 500억원 ▲BBB+이하 200억원이다. 한국투자증권은 내규에 ‘신용등급 BBB급 이하 등급을 전체 수신 자금의 50%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명기해 뒀다.

조선비즈

금융위원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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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량 채권 중심으로만 발행·유통 시장이 형성돼 있다는 점도 발행어음으로 자금을 조달한 증권사들이 안전한 투자만 하도록 부채질하는 요소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초대형 IB는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을 50% 이상 기업금융관련자산에 투자해야 하는데, 신용등급별로 인정 범위가 다르다. BBB+ 등을 포함한 신용등급 A 이하 채권은 발행시장은 물론 유통시장에서 사들인 것도 기업금융관련자산으로 포함된다.

AA 이상의 채권은 발행시장에서 매입한 물량만 인정되는 걸 고려하면 기업금융관련자산 규제에 있어서 A등급 이하 채권 편입이 유리한 셈이다. 하지만 증권사들이 굳이 이같은 이유 하나 때문에 신용등급이 낮은 자산에 투자하진 않는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 시장은 여전히 우량 채권 중심”이라며 “채무불이행 위험이 큰 채권을 유통시장에서 사서 마음을 졸이는 것보다 발행시장에서 안전한 채권을 매입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문수빈 기자(bea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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