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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 (월)

[단독] 1년짜리 상품인데, 30년 뒤 만기인 채권 담았네… 랩·신탁 사태 판박이 우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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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형 증권사는 크게 ‘종합투자금융회사(종투사)’와 ‘종투사이면서 초대형 투자은행(IB)’인 회사로 나뉜다. 종투사는 증권사가 자기자본의 2배까지 기업에 대출해 줄 수 있고 초대형 IB는 여기에 어음까지 발행할 수 있다. 종투사 시스템이 도입된 지 10년이 넘은 가운데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최근 이 제도를 손보겠다고 밝혔다. 성장성이 있는 기업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자본을 공급하라는 게 애초 도입 취지였는데, 증권사들이 편안히 앉아서 부동산 대출 등으로 과실만 취하고 있다고 판단해서다. 취임한 지 석 달이 안 된 새내기 금융위원장이 지적한 이 제도, 그중에서도 규제가 대폭 완화된 초대형 IB 사업자들의 실상을 짚어봤다. [편집자 주]

발행어음은 기껏해야 만기가 1년인 금융상품이다. 하지만 초대형 투자은행(IB)들은 발행어음 자금을 5년 이상 만기의 금융상품에도 투자한다. 평상시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돈을 찾으면 다른 데서 돈을 구해 지급해야 한다. 무엇보다 발행어음은 예금자보호 대상이 아니라서 뱅크런 사태에 유독 취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만기가 긴 상품에 투자하는 이유는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른바 ‘만기 미스매칭(불일치)’ 전략을 이용한 것인데,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제2의 채권형 랩어카운트·특정금전신탁(랩·신탁)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랩·신탁 사태는 2022년 하반기 레고랜드 발(發) 채무 불이행으로 벌어졌다. 랩·신탁에 담은 채권이 팔리지 않자 몇몇 증권사는 서로 짜고 랩·신탁 계좌에 담긴 채권을 폭탄 돌리기식으로 막았고,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영업정지 등의 중징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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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정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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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금융감독원이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 NH투자증권이 고객에게 발행어음을 팔아 받은 자금으로 투자한 자산 중 만기가 5년 이상인 건은 매입원금의 10.60%(6818억원)였다. 이는 발행어음 사업을 하는 초대형 IB 4곳(미래에셋·한국투자·NH투자·KB증권) 중 가장 높은 수치다.

만기가 30년가량 남은 자산도 다수였다. 올해 3월 7일엔 만기가 30년 남은 채무증권 100억원어치를 샀으며, 두 달 뒤인 5월 29일에도 만기가 30년 남은 지분증권 1000억원어치를 매수했다. 2022년 7월 21일 매수한 만기 30년짜리 지분증권은 올해 상반기 말 기준으로 162억4400만원의 손실이 나기도 했다.

이같은 만기 미스매칭은 증권사에 만연하다. 초과 수익을 내기 위해서다. 증권사는 투자자에게 발행어음을 팔고, 그 자금으로 채권·주식·부동산 등에 투자한 뒤 발행어음 만기가 돌아오면 투자자에게 약속한 원금과 이자를 지급한다. 자산은 만기가 길수록 수익률이 높아지는데, 결국 투자자에게 줘야 할 이자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 만기가 긴 장기 채권에 투자하는 것이다. 다만 NH투자증권 사례에서 보듯 만기가 많이 남았다는 건 리스크가 크다는 것이기 때문에 손실을 볼 가능성도 있다.

다른 증권사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편입한 자산 중에서 만기가 5년 이상인 자산의 비율은 한국투자증권 8.71%, KB증권 5.30%였다. 미래에셋증권은 0.55%로 4개 증권사 중에서 단연 낮은 수치를 보였다.

채권은 만기까지 갖고 있으면 채권을 발행한 회사가 부도나지 않는 이상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는데, 미스매칭의 문제는 만기가 너무 길다는 점이다. 즉 발행어음에 투자한 고객에겐 당장 1년 뒤에 돈을 돌려줘야 하는데, 채권은 30년 뒤에나 원금 회수가 가능한 것이다.

평소같은 때라면 채권 거래가 활발해 만기가 30년 뒤라도 다른 이에게 팔아 현금화할 수 있지만, 유동성 위기가 닥칠 때가 문제다. 아무리 신용등급과 금리가 높아도 채권이 팔리질 않아서다.

현재 초대형 IB를 포함해 종합금융투자사업자(종투사) 제도의 손질을 예고한 금융위원회가 걱정하고 있는 것도 이 지점이다. 종투사 제도를 연구한 한 학계 관계자는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산과 실제로 증권사가 운용하는 자산의 만기 미스매칭이 크게 나는 걸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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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63빌딩에서 바라본 여의도 증권가./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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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제2의 랩·신탁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염려도 나온다. 랩·신탁은 증권사가 일대일 계약을 통해 고객 자산을 운용하는 상품으로, 만기가 통상 3~6개월이라 법인 고객이 단기자금을 굴릴 때 찾는다.

증권사는 발행어음처럼 랩·신탁을 운용하면서 만기 미스매칭 전략으로 채권이나 어음을 담는데, 2022년 하반기 ‘레고랜드 발(發) 채무 불이행’으로 국내 채권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사고가 터졌다. 어떤 채권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자 고객이 랩·신탁에 만기를 맞았어도 돈을 돌려주지 못한 것이다.

이에 몇몇 증권사는 서로 짜고 고객 랩·신탁 계좌에 담긴 채권을 폭탄 돌리기식으로 막았다. 금감원에 따르면 A증권사는 한 고객의 만기가 돌아오자 이 고객 계좌에 담긴 기업어음(CP)을 당시 시장가격보다 1억2000만원 비싸게 B증권사에 팔았다.

그리곤 B증권사가 가진 CP 역시 1억2000만원 웃돈을 주고 사 오는 식으로 보전해 줬다. 이런 거래를 한 KB증권·NH투자증권·SK증권·교보증권·미래에셋증권·유진투자증권·키움증권·하나증권·한국투자증권 등 9개사는 금감원으로부터 영업정지 등의 징계를 받았다.

NH투자증권 관계자는 “고객은 사전에 정해진 확정수익률을 수취하고, 운용에 대한 손익은 발행 증권사가 책임지는 구조라 (만기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는) 크게 염려할 사항이 아니라고 본다”면서 “특히 당사는 타사에 비해 발행어음 잔액 자체가 크지 않고 전체 평균 만기도 1.4년에 맞춰서 운용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문수빈 기자(bea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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