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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월)

‘처제의 남편’ 영어로 하면? 한강 노벨상 낳은 번역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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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 대한 세계 독자들의 관심이 뜨겁다. 영국·프랑스에서는 품절 사태가 벌어졌다. 스톡홀름 스웨덴 아카데미에 전시된 한국 작가 한강의 책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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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채식주의자』가 영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해봤다. 영국 독자들은 유교적 위계에 따른 경직된 사회 질서를 이해할 가능성이 작았다.”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옮겨 2016년 한강과 함께 부커상 국제부문을 수상한 영국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37)의 후기다. 스미스는 2016년 계간지 ‘대산문화’ 여름호에 실은 번역 후기에서 “등장인물의 호칭을 옮기면서 개인의 이름 대신 ‘처제의 남편’ ‘지우 어머니’와 같은 관계에 기반을 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고 밝혔다. 위계를 나타내는 호칭을 통해 육식 거부로 가족과 갈등을 빚는 주인공 영혜가 느끼는 억압적 분위기를 살렸다는 뜻이다.

스미스는 한강의 소설을 세계에 소개한 번역가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번역가로 나서면서 업계의 틈새시장이었던 한국 문학에 관심을 뒀다. “영국에서 한국 문학을 접하기 쉽지 않았지만, 한국이 상대적으로 부유한 선진국인 것으로 보아 문학 출판이 활발할 것으로 짐작했다”는 이유에서다. 2010년 한국어를 독학하기 시작했고, 런던대에서 한국학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스미스가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건 2013년. 한국어 시작 3년 만이었다. 이후 한강의 『소년이 온다』 『흰』 『희랍어 시간』을 영어로 옮겼고, 그 중 『흰』은 2018년 부커상 국제부문 최종후보에 선정됐다. 『채식주의자』로 부커상을 받은 지 2년 만에 또다시 최종 후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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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품을 영어·불어로 번역한 데버라 스미스·최경란·피에르 비지우, 2022년 부커상 숏리스트에 오른 번역가 안톤허(왼쪽부터). [연합뉴스, 뉴스1,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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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출판시장에서 영어의 지배적 위치 때문에 영어권 독자는 외국 문학에 박하기로 유명하다. 미국 출판시장에서 번역서 비중은 3% 남짓. 스미스는 번역의 자연스러움과 문학적 완성도에서 긍정적 평가를 끌어내며 번역 문학의 문턱을 낮췄다는 평을 받았다. 2016년 말 뉴욕타임스는 ‘올해의 책 10권’ 중 하나로 『채식주의자』를 꼽으며 스미스를 “품격있는 번역으로 한국어 원문을 날카롭고 생생한 영문으로 바꾼 번역가”라고 소개했다.

한국문학번역원·대산문화재단 큰 역할

한국 작가가 국제 문학상 수상으로 주목 받으면서 한국 문학을 세계에 소개하려는 번역자가 늘어나고, 번역 문학의 증가가 다시 문학상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어낸 데는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의 공이 컸다. 교보생명의 대산문화재단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은 수십 년 전부터 한국 문학 번역을 지원했다.

대산문화재단은 『채식주의자』 영어판 출간을 위해 영국 출판사 포르토벨로북스와 스미스에게 2014년 번역 출판 자금을 지원했다. 노벨 문학위원회 안나 카린 팜 위원이 추천한 『소년이 온다』를 비롯해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희랍어 시간』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등을 독일어·불어·스페인어로도 번역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번역가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한강 작품 6권이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운영하는 번역아카데미 교수와 수료생 번역으로 출간됐다.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가라』 『채식주의자』 『흰』 등을 네덜란드어·불어·스페인어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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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 중심가의 한 서점에 노벨문학상 특별 코너가 마련된 모습. 이도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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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부커상 수상은 한국 문학 세계 진출을 가속했다. 2022년에는 정보라의 『저주토끼』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나란히 부커상 국제부문 1차 후보에 올랐고, 『저주토끼』는 숏리스트(최종 후보)까지 진출했다. 이 두 작품의 영어 번역자는 한국인 번역가 안톤 허(43)다. 그는 2022년 홍진기 창조인상 수상 후 “『저주토끼』를 접한 후 책의 문장이 아름답고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여러 해외 출판사에 출간을 제안해 계약했다”며 “번역뿐 아니라 작품을 고르는 것, 번역권을 따는 것, 해외 출판사를 찾는 것, 홍보까지 번역가의 일”이라고 소개했다. 2023년 천명관 『고래』, 올해 황석영 『철도원 삼대』 등 한국 문학은 3년 연속으로 부커상 최종심에 진출했다. 『저주토끼』와 『철도원 삼대』도 번역원 지원을 받았다.

번역지원 예산 5년간 18억, 올해 20억

최근 급증한 해외 한국 문학 독자 수에 비해 국가적 번역 지원이 미미하다는 지적도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강유정 의원(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번역 출판 지원사업 예산은 2019~2023년 5년간 매년 18억원이었다. 올해 20억원으로 조금 늘었지만, 양질의 번역 출판을 유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게 강 의원 지적이다. 그는 “영미 출판계는 번역서 출판을 잘 안 하기 때문에 작은 파이를 놓고 여러 나라의 경쟁이 치열하다”며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 문학 번역 사업이 확대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찬제 서강대 국문과 교수는 “한국 문학을 해외 독자에 소개하기까지, 우수한 번역가를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외 출판사에 한국 문학을 팔고 홍보하는 여러 단계의 작업이 필요하다. 출간이 아니라 흥행이 목표이기 때문에 메이저 출판사와 접촉하고 설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많다”며 “문학을 공산품 취급하면 빠르게 많은 번역서를 찍어내는 데 급급하게 된다. 이런 접근에서 벗어나 장기적 관점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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