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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월)

[단독] 고속터미널 지하상가 불법재임대 판치는데… 서울시설공단은 ‘뒷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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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투몰’ 이중임대료에 상인 고통

임차인이 전차인에 한 번 더 임대

계약해지 대상 불구 수십 년 횡행

‘비밀유지 위반 땐 배액’ 조항 협박

市대부료에 전대인보험료 등 대납

점포 620곳 중 300곳 전대차 계약

운영사 임원 등 수십명 ‘불로소득’

비대위 “전차인 위한 정책 마련을”

시설公 “최근 증거 확보… 해결 노력”

‘고터’로 불리는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고투몰) 한 의류매장에서는 올해 초 소동이 벌어졌다. 한 남성이 여주인에게 월세를 왜 안 내느냐고 묻더니 이내 언성을 높였다. “돈을 안 내면 범법자 아니에요? 낼 거요, 안 낼 거요? 안 내면 내가 조치해 버릴 거야.”

세입자에게 밀린 월세를 독촉하는 점포 주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고터 지하 점포는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거나 임대해서 수익을 얻을 수 없다. 서울시 공유재산이기 때문인데, 이 남성은 서울시 관계자도, 지하도상가 운영을 책임지는 서울시설공단 직원도 아니었다. 친박근혜계 정치인 출신인 그는 해당 점포를 불법으로 재임대한 김모씨의 남편이었다.

세계일보

12일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 점포에 상가 대부료 인상을 규탄하는 문구가 게시되어 있다. 이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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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임대료에… 명동보다 비싸

점포와 보도면적을 합쳐 3만1566㎡. 버스터미널과 지하철 3개 노선, 백화점이 몰려 하루 유동인구가 최대 100만명에 달하는 고터 지하상가가 불법 ‘월세 장사’에 악용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고터 지하도상가는 서울시설공단이 관리하는데, 시설공단은 민간법인인 ‘고투몰’과 계약을 체결해 상가 운영을 위탁하고 있다.

김씨 부부의 사례와 같이 시설공단으로부터 점포를 임대받은 임차인 상당수가 개별임차인과 임대차(전대차) 계약을 할 수 없다는 법을 어기고 재임대를 통해 불법 수익을 편취하고 있는 것이다.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과 서울시 지하도상가 관리 조례는 대부를 받은 자가 다른 자에게 재산을 사용하게 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13일 고터 전차인 등으로 구성된 ‘고투몰 실제 영업하는 상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에 따르면 고터 620여개 점포 중 최소 300개가 불법전대 상태인 것으로 파악됐다. 비대위가 시설공단으로부터 받은 임차인 목록을 실제 점포 사업자등록 현황 등과 비교하고 임차인 정보를 추적한 결과다. 그간 상인들 사이에서 고투몰 불법 재임대는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졌지만, 상인들이 직접 전수조사를 통해 불법계약의 규명을 시도해 실체가 드러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시설공단의 표준임대차계약서에 따르면 고투몰 23.14㎡(약 7평) 점포의 임대보증금(증권)은 약 2870만원, 연 대부료는 3157만원 수준이다. 취재를 종합하면 전차인 가운데 상당수는 재임대의 대가로 서울시에 내는 대부료의 2∼3배를 월세로 내고 있었다. 대부료는 물론 불법전대인에게 주는 별도의 임차료와 관리비, 심지어 전대인의 4대 보험료 전부 또는 일부까지 대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전대인들은 점포당 매월 최소 300만원대, 목이 좋은 ‘로열’ 점포에선 600만원대 부당이득금을 가져가는 것으로 파악됐다.

30여년째 고터 지하상가에 몸담고 있는 이모(65)씨는 “지난 연말 서울시 대부료 46%가 올랐는데, 전대인은 임차료 370만원을 조금도 내려줄 수 없다고 한다”고 토로했다. 비대위 소속 상인 김영철(55)씨는 “고터 지하 매장 월세가 평(3.3㎡)당 100만원 선에 형성되어 있는데, 국내서 가장 땅값이 비싼 명동 1층 상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금액”이라며 “서울시와 전대인에 각각 내는 이중 임대료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명동거리·명동역 일대 평균 상가임대차 시세는 각각 1㎡당 17만3700원·15만3600원 선으로, 평당 100만원을 밑돌았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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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투몰 이사진도 불법… 비밀유지 요구

이처럼 불법전대가 만연하지만 문서상 전대행위가 드러나지 않는 건 사업자등록증과 사업자 통장 등 점포 영업에 사용되는 명의 일체가 전대인의 것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불법전대가 외부로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비밀유지 의무조항을 두는 것도 일반적이다.

실제 세계일보가 입수한 한 점포위탁경영 약정서를 보면, 시설공단으로부터 점포를 임대받은 전대인 A씨는 전차인 B씨에게 월 400여만원의 임대료를 받는 대가로 점포 영업을 수탁하면서 B씨가 ‘비밀유지 의무를 위반하거나 누설해 고투몰이나 서울시설공단으로 하여금 전대금지 조항을 문제 삼을 빌미를 제공한 경우 배액을 위약벌로 지급하고,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한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상인들은 이러한 조항이 상인들로 하여금 불법전대의 부당함을 외부에 폭로할 수 없도록 만드는 올가미라고 설명한다. 15년 차 상인 유모(34)씨는 “나의 경우 권리금 2억800만원, 보증금 9000만원이 묶여 있고, 전 재산을 점포에 깔고 앉아 있는 다른 상인이 많다”며 “괜히 나섰다가 불법전대가 문제로 불거져 명도를 당할 경우 목돈을 모두 까먹게 되기 때문에 상인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전대인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12일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 점포에 상가 대부료 인상을 규탄하는 문구가 게시되어 있다. 이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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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불법전대를 자행하는 임대인 가운데 전대를 걸러내야 할 고투몰의 임원진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다. 비대위에 따르면 고투몰 이사 5명, 고문 18명 등 최소 23명이 점포 전대로 불로소득을 거둬들이고 있다. 두 개 이상의 점포를 보유하거나 본인이 아닌 가족 명의 계좌로 월세를 입금받는 이들도 상당수다.

고투몰에서 20년 가까이 일해온 장미선(53) 비대위 부위원장은 “시설공단이 불법전대 구조를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사이 서울시 공유재산 관리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실제 영업하는 상인들을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치부해 왔다”고 비판했다.

김영철씨는 “강남 지하상가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중임대료와 사기계약 등 불법전대로 고통받는 상인이 많은 것으로 안다”며 “고투몰뿐만 아니라 지하상가의 모든 전차인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설공단 관계자는 “관련 사안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최근 일부 증거자료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글·사진=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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