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번역해 작가 한강과 국제부커상을 공동으로 수상한 데버라 스미스. 2016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옮겨 2016년 한강과 함께 부커상 국제부문 상을 받은 영국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37)의 번역 후기다. 스미스는 2016년 계간지 대산문화 여름호에 남긴 번역 후기에서 "등장인물의 호칭을 옮기면서 개인의 이름 대신 ‘처제의 남편’, ‘지우 어머니’와 같은 관계에 기반을 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고 밝혔다. 문화적 특수성을 고려해 고유명사 대신 위계를 나타낼 수 있는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육식을 거부해 가족과 갈등을 빚는 주인공 영혜가 느끼는 억압적 분위기를 살렸다는 뜻이다.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서울야외도서관 광화문책마당'에서 시민들이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다 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데버라 스미스는 한강의 소설을 세계에 소개한 번역가다. 스미스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번역가로 진로를 정하면서 번역 업계에서 틈새시장이었던 한국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됐다. "영국에서 한국 문학을 접하기 쉽지 않았지만 한국이 상대적으로 부유한 선진국인 것으로 보아 문학 출판이 활발할 것으로 짐작했다"는 게 그 이유.
2010년 한국어를 독학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런던대 동양 아프리카대에서 한국학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스미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것은 2013년. 그가 한국어를 시작한 지 불과 3년이 지난 때였다. 이후에도 한강의 『소년이 온다』 『흰』 『희랍어 시간』을 영어로 옮겼고 그 중 『흰』은 2018년 부커상 국제부문에서 최종후보 여섯 작품 중 하나로 선정됐다. 자신이 번역한 『채식주의자』로 2016년 부커상을 받은 지 불과 2년 만에 또다시 최종 후보가 된 것이다.
12일(현지시간) 오후 영국 런던 대형 서점 포일스 채링크로스점 언어 섹션에 한국 소설가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특별코너가 설치된 가운데 독자들이 한국어책 서가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글로벌 출판 시장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지배적 위치 때문에 영어권 독자들은 외국 문학에 박한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출판 시장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3% 남짓이다. 데버라 스미스의 번역은 자연스러움과 문학적 완성도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끌어내며 번역 문학의 문턱을 낮췄다는 평을 받았다. 2016년 말 뉴욕타임스는 '올해의 책 10권' 중 하나로 『채식주의자』를 꼽으며 스미스를 "품격있는 번역으로 한국어 원문을 날카롭고 생생한 영문으로 바꾼 번역가"라고 소개했다.
한국 작가가 국제 문학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고, 한국 문학을 세계에 소개하려는 번역자가 늘어나면서 번역 문학의 증가가 다시 문학상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어낸 데는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의 공이 컸다.
교보생명의 대산문화재단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은 수십 년 전부터 한국 문학 번역을 지원해왔다. 대산문화재단은 『채식주의자』 영어판을 출간하기 위해 영국의 출판사 포르토벨로북스와 스미스에게 2014년 번역 출판 자금을 지원했다. 안나 카린 팜 노벨 문학위원회 위원이 추천한 한강 작품 『소년이 온다』를 비롯해 『작별하지 않는다』 『희랍어 시간』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등을 독일어·불어·스페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번역가 인큐베이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강 작가의 번역 출간작 중 6권이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운영하는 번역아카데미의 교수와 수료생의 번역을 거쳤다. 이들은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가라』 『채식주의자』 『흰』 등을 네덜란드어·불어·스페인어로 옮겼다.
정보라의 『저주 토끼』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영어로 번역한 안톤 허.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16년 한강의 부커상 수상은 한국 문학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2022년 정보라의 『저주 토끼』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나란히 부커상 국제부문 1차 후보에 올랐고, 『저주 토끼』는 단 여섯 작품만 이름을 올리는 숏리스트(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이 두 작품을 모두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 한국인 번역가 안톤 허(43)다. 그는 2022년 홍진기 창조인상 수상 후 인터뷰에서 “『저주토끼』를 접한 후 책의 문장이 아름답고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여러 해외 출판사에 출간을 제안해 계약을 했다”며 “번역뿐 아니라 작품을 고르는 것, 번역권을 따는 것, 해외 출판사를 찾는 것, 홍보까지 번역가의 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2023년에는 천명관 『고래』 올해는 황석영 『철도원 삼대』가 같은 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한국 문학은 3년 연속 부커상 최종심에 작품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저주 토끼』와 『철도원 삼대』는 번역원의 지원을 받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결정된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인근에 설치된 뉴스전광판에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국 작가 한강이 선정됐다는 문자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최근 급증한 해외 독자 수에 비해 국가적 번역 지원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라는 지적도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강유정 의원에 따르면 번역 출판 지원사업 예산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간 약 18억원에 머물렀다. 올해 예산은 20억원으로 소폭 늘었지만, 양질의 번역 출판을 유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게 강 의원의 지적이다. 강 의원은 "영미 출판계는 번역서 출판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작은 파이를 놓고 여러 나라의 비중 확대 경쟁이 치열하다"며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 문학 번역 사업이 확대되길 바란다"고 했다.
우찬제 서강대 국문과 교수는 "한국 문학을 해외 독자에 소개하기까지는 우수한 번역가를 구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해외 출판사에 한국 문학을 팔고 홍보하는 여러 단계의 작업이 필요하다. 출간이 목표가 아니라 흥행이 목표이기 때문에 메이저 출판사와 접촉하고 설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많다"며 "문학을 공산품 취급하게 되면 빠르게 많은 번역서를 찍어내는 데 급급하게 된다. 이런 접근에서 벗어나 장기적 관점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