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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한강의 수상이 통쾌했던 이유…'노벨상 시즌'의 헛고생을 떠올리다 [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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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노벨문학상 수상자 작품을 원문으로, 이제는 책을 읽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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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SBS 문화예술전문기자가 전해드리는 문화예술과 사람 이야기.


문화부에서 근무하면서 매년 '노벨문학상 시즌'을 맞이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노벨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이 선정해 매년 10월 둘째 주 목요일에 발표하는 게 관례인데, 스웨덴 현지에서 오전에 발표하면 한국 시각은 저녁 8시쯤이 됩니다. 8시 뉴스가 진행되는 도중 수상자가 발표되기 때문에 발표를 보고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면 시간이 굉장히 빠듯합니다. 만약 한국인 수상자가 나온다면 큰 뉴스이니, 가능하다면 미리 여러 건의 기사를 준비해 두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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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노벨문학상의 영예는 우리나라 소설가 한강에게 돌아갔다. 사진 : 노벨상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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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수상에 대비해 '헛고생'을 반복했다



2000년대 초중반부터 영국의 도박 사이트를 인용한 외신 보도 등에서 고은 시인이 후보로 거론되었고, 2005년부터 본격적인 '노벨문학상' 시즌이 시작됐습니다. 2005년은 세계 최대 도서전인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 열리는 해였고, 한국이 주빈국이었습니다. 유럽에서 한국 문학을 조명하는 행사들이 열렸고,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분위기였죠.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고은 시인 역시 해외의 시 낭송회나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많이 초청받았습니다.

한국인 첫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고, 유력 후보인 고은의 자택 앞에 중계차까지 배치했습니다. 하지만 2005년 노벨문학상은 영국의 극작가 해롤드 핀터에게 돌아갔습니다. 기자들은 헛고생을 한 셈이죠. 당시 '고은 노벨문학상 수상 실패'라는 제목으로 속보를 내서 빈축을 산 매체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후에도 '헛고생'은 계속됐습니다. 매년 10월 초만 되면 '노벨문학상 시즌' 대비 회의가 열렸습니다. 고은이 수상할 경우, 황석영이 수상할 경우 등등 경우의 수에 맞춰 작가 소개, 작품 세계 소개, 한국 문단 큰 경사, 한국 문학 번역 현황 등등 여러 건의 관련 기사를 기자들에게 배당하고, 관련 영상을 촬영하고, 작품 세계와 관련한 전문가 인터뷰를 하고, 미리 리포트를 편집했습니다.

연례 행사 같았던 노벨문학상 시즌의 풍경



다음 해가 되면 전년도 기사를 다시 꺼내서 업데이트합니다. 기사도 손보고, 더 찍을 영상은 찍고, 인터뷰 새로 할 건 또다시 합니다. 2012년이었던가요, 문화부에서 다른 부서 갔다가 몇 년 만에 복귀해 보니, 제가 2005년에 썼던 기사들이 아직도 '면면히' 전해져 오고 있는 걸 보고 쓴웃음이 났습니다. 별 의미 없이 때 되면 하는 '연례 행사' 같은 느낌이 들었지요. 고은 자택 앞 중계차 담당 역시 몇 년째 같은 기자가 배치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사장되는 기사 말고 의미 있는 기사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2012년 수상자 발표 다음 날, 저는 '왜 못 타나'에 초점을 맞춘 기사를 썼습니다.

▷ 또 실패…한국은 왜 노벨문학상 못 타나? (2012.10.14. SBS 8뉴스)

100명 가까운 취재진이 고은의 자택 앞에 대기하다가, 수상자가 발표되자 허탈한 표정으로 철수하는 '웃픈' 풍경으로 시작한 이 기사에서, 저는 한국 문학 번역 현황이 미흡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또 한국인의 독서량은 OECD 꼴찌 수준이고, 훌륭한 작품과 작가를 계속 배출해 낼 수 있는 토양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고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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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번역 작업을 지원해 온 대산문화재단 곽효환 사무총장(후에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지냈습니다)은 당시 인터뷰에서 번역의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지금 우리는 좋은 작품을 따라 읽는 독자층이 무너진 상태에서 작가 혼자 작품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저는 기사에서, 한국인들이 하도 순위 매기기와 경쟁에 익숙해지다 보니 노벨문학상도 무슨 국가별 대항전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고, 상 자체보다 우리 문학에 더 관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썼습니다.

2013년, 저는 다시 문화부를 떠나 다른 부서로 가면서 '노벨문학상 시즌'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후에도 예전 기사들이 끄집어져 나왔다가 다시 서랍에 들어가는 일들이 몇 번 반복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은과 한림원의 성추문... '헛고생'이었던 게 다행



2016년 문단의 미투 운동이 시작됐고, 2017년 말 최영미 시인이 '괴물'이라는 시를 발표하며 고은의 성추행을 폭로했습니다. 이 시는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진다'는 'En' 시인을 언급했고,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이 나라를 떠나야지/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라고 했습니다.

고은은 2018년 최영미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고, 패소했습니다. 오랫동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고, 한국 문단의 중심에 있었던 고은은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고은이 노벨문학상을 탈 경우를 대비한 기사를 몇 년간 반복적으로 써왔던 저는, 더욱 환멸을 느꼈습니다. 기사 쓰면서 '이제 헛고생 그만하게 상 좀 받지' 생각했던 걸 떠올리니 찜찜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노벨상을 받았다면?' 생각하니 말 그대로 오싹해졌고, 제가 했던 고생이 '헛고생'이었던 게 다행이라고 안도했습니다.

2018년은 스웨덴 한림원이 성추문에 휘말려 노벨문학상 시상을 취소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2017년 11월, 여성 18명이 한림원 종신위원인 카타리나 프로텐손의 남편 장 클로드 아르노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습니다. 아르노는 아내를 통해 한림원에 두터운 인맥을 쌓고 문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고, 한림원은 이 사건에 적극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종신위원들이 항의의 뜻으로 사퇴했고, 파문이 커지면서 노벨문학상 시상도 취소됐습니다.

한강의 수상 소식에 후련하고 통쾌했다



고은도 아르노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타인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 한동안 노벨문학상에 신경을 끄고 지냈습니다. 노벨문학상 자체에 환멸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게다가 지금 저는 디지털뉴스부서 소속으로 문화부에 있을 때처럼 속보를 챙겨야 할 필요도 없으니, 이즈음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다는 사실 자체도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10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저에게 더욱 놀랍고 기쁜 소식으로 다가왔습니다. 한강은 2016년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채식주의자), 지난해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작별하지 않는다), 올해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작별하지 않는다)을 받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지만,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지는 않았습니다. 회사에서 저녁에 잡힌 다른 녹화 일정을 마치고 나와 보니, 말 그대로 난리가 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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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지 못했던 수상이라 당일 SBS 8뉴스에는 급히 쓴 리포트 하나만 나갔습니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 곧 뉴스 속보까지 편성해 수상 소식을 더 자세히 전했고, 마감 뉴스인 나이트라인에서도 여러 건의 기사로 비중 있게 다뤘습니다. 그날 중요한 공연을 보러 갔던 타사의 공연 담당 기자들도 공연 도중 호출을 받고 다 회사로 복귀했다고 하니, 정말 문화부 기자들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큰 뉴스인 셈입니다. 이렇게 극적으로 드디어 한국인 수상자가 나왔고, 그 주인공이 한강 작가라는 사실에 제 속이 다 후련하고 통쾌했습니다. 노벨문학상 시즌의 찜찜했던 기억을 한 방에 날려버렸습니다.

한강은 폭력이 개인에게 가하는 상처와 인간의 고통에 집중해 온 작가입니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의 수상을 발표하면서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언급했습니다. 한강은 2014년 발표한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2012년에 낸 '작별하지 않는다'로 제주 4.3 사건을 다루면서, 국가 폭력이 개인에게 남긴 상처를 서정적인 문체로 형상화했습니다. 한강을 처음 국제적인 작가로 만든 '채식주의자'는 어린 시절 폭력의 트라우마로 육식을 거부하며 가족과 갈등을 빚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이 여성은 가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가부장의 폭력에 저항하며, 금식을 통해 동물성을 벗어 던지고 차라리 나무가 되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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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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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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