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대형 옻칠 회화를 바라보고 있는 성파 스님. '유동' 섹션에 걸린 이 작품을 두고 스님은 "바람과 물이 그렸다"고 했다.예술의전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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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어둠이다. 전시장 초입에 들어서면 검은 통나무 기둥이 30여 점 군데군데 놓여 있다. 큰 것은 높이가 3m에 달한다. 영국의 '스톤헨지'를 닮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삼베에 옻을 여러 차례 거듭 칠해 태초 이전의 암흑을 형상화했다. 통나무 사이사이를 걸으면서 묻는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어떤 존재였을까.
조계종의 정신적 최고지도자인 '종정' 성파 스님(85)의 개인전이 화제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지난달 27일 개막한 '성파 선예 특별전-COSMOS'는 무심코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긴 관람객에게 큰 감동과 환희를 안겨준다.
승려 신분을 차치하더라도 40년이 넘는 화업에 회화면 회화, 도자면 도자, 염색과 서예, 사경까지 다양한 장르에 걸쳐 고품격을 보인 작가는 흔치 않다. 전시장에 펼쳐진 작품 120여 점을 면면히 살펴보면 그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전통에 바탕을 둔 미술 한류를 일으키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이 결코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태초' 섹션에 전시된 가변설치(삼베에 옻칠)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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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에선 장욱진의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가 떠오르고, 어떤 것은 단색화가들의 비움의 미학이, 또 어떤 것은 강렬한 색면추상이 관람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평면과 3차원 공간을 가로지르는 그의 예술세계는 한없이 자유롭고 대담하다. 물속에 잠긴 회화에선 대형 설치작가 뺨치는 실험정신이, 금니로 필사한 사경에선 시서화로 무장한 탄탄한 기본기가 느껴진다.
전시는 크게 6개의 섹션으로 이뤄져 있다. 우주가 탄생하기 이전의 세계를 형상화한 '태초'를 지나면 모든 것이 변화하고 흐르는 '유동' 섹션에 이른다. 이곳에선 높이 220㎝, 폭 150㎝에 이르는 대형 회화 10여 점이 걸려 있다.
작가의 무의식을 펼쳐낸 '꿈' 섹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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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붓이나 손가락 등 도구가 아닌 바람과 물이 그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천에 물감을 섞은 옻을 붓고 화폭을 이리저리 기울여 물감이 흘러내리게 했다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날엔 작업실 밖에 화폭을 펼쳐놓아 물감이 자연스럽게 퍼지도록 했다.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적절하게 배합해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아름답게 형상화했다.
세 번째 '꿈'의 섹션은 종정이라는 무게감을 벗어던진 자연인 성파의 무의식이 펼쳐진다. '승려라면 이런 그림을 그리겠지'라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버린다. 단순하고 굵은 필치로 그린 자화상 몇 점과 성기가 부각된 서 있는 나신은 강렬함을 선사한다. 초현실적인 무의식의 세계에선 꿈틀꿈틀하는 생의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것 같다.
네 번째는 형형색색의 도자기로 철학적 메시지를 던지는 '조물' 섹션이다. 도자기를 빚는 과정 자체에 '중생이 부처 되는 이치'가 담겨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흙을 빚어 초벌구이 했을 때까지는 언제든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만, 다시 불에 넣어 태워서 도자기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이지요."
'조물' 섹션의 도자기 작품. 도자에 옻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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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궤적'은 어릴 적 한학으로 서당에서 신동 소리를 들었던 그가 그렸던 시서화와 금니 사경이 펼쳐진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물속의 달'로 옻칠의 방수성을 응용해 옻칠을 입힌 대형 회화를 물속에 넣은 설치 작품들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물속에서 수천 년을 버텨왔듯, 그의 작품도 옻칠로 무장해 후대에 전승될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마주하는 작가의 글은 전시의 감동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다. "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평상의 마음이 도다. 이 작품들은 나의 평상심으로 작업한 결과물이다. (중략) 작업하는 과정은 늘 즐거웠다. 어찌 보면 새로운 시도이고, 무에서 유가 나오는 이치의 장이었다. 운문 선사의 말처럼 나에게 일상은 '날마다 좋은 날'이다."
작가는 평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깝다고 했다. 일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작품으로 말하고 있다. 전시는 11월 17일까지.
[이향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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