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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한국서 팔려 와 유럽에 입양된 게 행운이라고요?"...입양인들을 분노케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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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한분영, 페테르 묄레르 외 2명 '자기 자신의 목격자들'
한국일보

생후 4개월 때 벨기에 가정에 입양된 레나테 판 헤일의 어릴 적 사진. 글항아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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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에르-토네 우엘란 신이라는 이름으로 노르웨이에 사는 김정아씨는 14세 때인 1978년 입양돼 바다를 건넜다. 당시 양부모의 나이는 55세와 54세. 입양 부모와 입양아의 나이 차가 40세를 넘으면 안 된다는 규정을 어긴 불법 입양이었다. 김씨에겐 지옥 같은 삶이 펼쳐졌다. 양부는 김씨를 강간하고 때렸고 양모는 남편을 신고하거나 제지하는 대신 김씨를 미워하며 허드렛일을 시켰다.

김씨의 사연은 책 ‘자기 자신의 목격자들’에 담겼다. 한국에서 태어나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미국, 벨기에로 입양된 35명의 이야기 43편이 실렸다. 한 명당 3~10쪽의 짧은 분량이지만, 입양인 본인은 물론이고 입양 부모, 입양인의 배우자, 자녀 등의 시선을 통해 해외 입양 문제를 입체적으로 다루었다.

선진국임을 자랑하는 유럽 국가에서도 입양인들은 이런 말을 듣는다. “입양된 것에 대해 이 나라와 양부모, 우리 사회에 감사해야 한다”거나 “(우리에게) 입양된 건 행운”이라고. 2세 때 덴마크 가정에 입양된 안 안데르센은 무엇에 대해 감사해야 하냐고 되묻는다. “한국에서 팔려 이곳에 왔다는 것에 대해서요? 한국의 뿌리, 가족, 정체성을 잃은 것에 대해서요?” 김정아씨 역시 “그런 말이 입양인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해외 입양인들은 부모를 잃을 뿐 아니라 고국의 언어, 문화, 인종적 뿌리까지 완전히 잘리는 단절의 삶을 산다. 별 문제 없이 자란 것처럼 보이는 입양인조차 인종차별이나 따돌림 같은 사회적 학대와 정체성 문제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산다.
한국일보

자기 자신의 목격자들·한분영 외 3명 지음·안철흥 옮김·글항아리 발행·320쪽·1만9,500원


과거 한국의 입양아 수출은 불법과 비리로 얼룩졌다. 입양인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허위이거나 허술하게 기재된 서류를 근거로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고 또다시 절망한다. 서류 위조와 착오가 많다 보니 친부모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책에 나오는 35명 중 친부모를 찾은 입양인은 4명뿐이다. 입양 비리는 아이를 정성껏 키운 양부모에게도 상처를 남긴다. 1998년 한국 아이를 입양해 키운 노르웨이인 크리스틴 몰비크 보튼마르크는 입양 서류 위조 등 비리를 알게 된 뒤 “인권을 침해하는 데 가담한 것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페테르 묄레르 덴마크한국인 진상규명 그룹(DKRG) 대표는 “(한국의) 해외 입양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서구 국가들의 (입양)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그리고 이들 국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뤄졌다”면서 “한국 아이들이 외교 정책 도구로 쓰였다”고 꼬집는다. 입양인들이 한국의 입양 시스템과 관련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건 자신들의 과거를 바로잡는 일일 뿐 아니라 또 다른 비극을 막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정부에 따르면, 지난해에도 79명의 아이가 한국에서 입양 가정을 찾지 못해 해외로 입양됐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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