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국회 법사위의 대법원 국정감사장, 천 처장(대법관)은 사법부가 자체 진단한 재판 지연의 원인과 해법을 설명하려다 이내 제지당했다. “10년간 법관 수 동결”, “디스커버리 제도 미도입” 등 지연 원인을 설명하던 중 정 위원장이 “무한정 시간을 줄 수 없다”며 잘랐기 때문이다. 천 처장은 잠시 후 “짤막하게 말하겠다”며 재차 설명을 시도했다. 하지만 정 위원장은 “제가 아까 서면으로 제출하라 했다”며 또 끊었다. 천 처장은 미리 준비해온 각종 분석 자료를 앞에 두고 하릴없이 입을 닫았다.
지난 7일 오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이 업무 보고를 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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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12시간(휴정 시간 포함) 진행된 국정감사에서 재판 지연 문제는 이렇게 계속 무시됐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인사말부터 “사법부 자체 노력엔 한계가 있다. 국회의 많은 관심을 간곡하게 부탁드린다”고 호소한 것을 귀담아듣는 이는 많지 않았다. “재판 지연이 문제”라는데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여야 의원들은 정쟁의 소재로 쓰는 데만 열중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국민의힘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탓했다. 그의 공직선거법 위반 1심 선고(11월 15일)가 기소 후 799일 만에 난다는 점에 집중해 “법원이 (이 대표) 주장을 다 받아들여 줘서 일부러 심리를 늦게 하는 것 같다. 거대 야당 대표란 이유만으로 지연시켜도 되느냐”(곽규택 의원), “이 대표의 방탄 단식, 동료 의원의 방탄입법 등 정치쇼가 있었다”(송석준 의원)고 주장했다.
반면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 성남FC 의혹 관련 재판에서 검찰이 478명이나 증인 신청했다. 재판을 지연하는 것은 검찰”(정청래 의원)이라며 검찰로 탓을 돌렸다. 판사 출신인 김승원 의원도 “국민의힘이 재판 지연 원인을 민주당이나 이 대표에게 있는 것처럼 얘기해 국민이 오해한다”며 “검찰의 무도한 수사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날 법관 증원,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등에 대한 입법적 해법에 관한 논의는 실종됐다. 외려 재판 지연이 “이재명 탓”이란 국민의힘 공세를 민주당이 반박하는 과정에서 “재판 지연은 법관 숫자가 부족해서만이 아니다”(정청래 의원)는 주장까지 나왔다. 2014년 이래 10년째 3214명으로 동결된 법관 정원이 정쟁 속에 또 묶일 판이 됐다.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강정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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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사법부의 다른 한 축인 헌법재판소에서 헌재 마비 우려가 터져 나왔다. 8일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심판 변론준비기일에서 문형배 재판관은 청구인인 국회 측 변호인에게 “재판관 3명이 공석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6명이 남게 되고, 6명이면 변론을 열 수 없다”며 “국회 입장은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다.
헌법과 헌법재판소법에 따라 헌재는 재판관 9명 중 7명 이상의 출석으로 심리하고, 그 중 6명 이상 찬성으로 위헌·탄핵 등 결정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종석 헌법재판소장과 이영진·김기영 재판관이 오는 17일 임기 만료로 퇴임한다. 국회 추천 몫인 이 3명 자리를 놓고 여야가 각각 몇 명을 추천할지 다투면서 후임 후보자조차 정하지 않고 있다.
결국 헌재 마비 사태는 일주일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진숙 위원장 탄핵심판뿐 아니라 위헌·정당해산·권한쟁의심판 등 헌재 업무가 올스톱된다. 후보자 선정→국회 인사청문회→대통령 임명까지 소요 기간이 최소 한 달인만큼 당장 후보자를 정해도 일정 기간 마비는 불가피하다.
재판 지연과 헌재 마비 사태는 결국 입법부인 22대 국회의 책임 방기로 벌어지고 있다. 정쟁 탓에 역대 최장 지각 개원식이 열린 지난달 2일 우원식 국회의장은 “삼권 중 어느 하나가 과도한 권한을 행사하면 삼권분립이 무너지고, 국민의 권리가 침해당한다”고 말했다. 국회가 응당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책무를 저버려도 삼권의 한 축이 무너지고 국민의 권리는 침해당한다.
지난달 2일 제22대 국회 개원식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렸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개헌사를 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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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악이라 불렸던 21대 국회에선 그나마 법관증원법이나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법은 발의라도 됐다. 차진아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입법부가 해야 할 일은 안 하면서 엉뚱하게 탄핵안만 사법부에 제출하고 있다”며 “국가 시스템을 위해선 22대 국회를 탄핵해야 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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