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파든 매파든 日정치인, 결국 국익 추구가 핵심
日 총리 누가되든 韓 국력 키우지 않고선 협력 쉽지 않아
백범흠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초빙교수(전 한중일협력사무국(TCS) 사무차장) |
(서울=뉴스1) 백범흠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초빙교수 = 지난해 일본은 세계 경제력 순위에서 독일에 역전당해 4위로 내려앉았다. 1968년 서독을 제치고 세계 2위에 올라선 지 55년 만이다. 2010년 중국에 역전당해 세계 3위가 된 후 13년 만에 한 계단 더 내려간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의하면, 일본은 2026년쯤 인도에도 밀릴 것이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00~2022년간 독일의 경제성장률이 1.2%였던데 비해 일본은 0.7%에 그쳤다고 분석했다.
인구 고령화와 감소, 지속적인 엔화 약세, 산업구조 불균형은 축소된 일본의 경제 규모를 더 축소시키고 있다. 서서히 위축돼 온 경제를 경험해 온 일본인들은 경제력 순위에서 55년 만에 독일에 재역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있다. 닛케이 225 지수가 역대 최고치를 눈앞에 두는 등 증시가 호조를 이어가고 있고, 다수 국민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며, 1인당 국내총생산(GDP)도 크게 감소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雪國)이다.'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장면이다. 가와바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로 그해 일본은 당시 세계 2위 경제대국 서독을 제쳤다. 일본은 부유하고, 깨끗한 일류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스시는 최고급 음식으로 손꼽히게 됐으며, 토요타와 혼다는 세계 최고의 차로 각광받았다. 소니와 도시바, 파나소닉 등의 전자제품은 세계시장을 휩쓸었다.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은 곧 '월드 베스트'(world best)였다. 벚꽃처럼 화려하게 피어오른 일본 경제는 미국 경제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1989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와 모리타 아키오 소니 창업자가 공동으로 에세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출간했다. 전후 일본의 절정기였다.
4월의 벚꽃처럼 불타올랐던 일본 경제는 1985년 미국과 일본, 서독 대표 등이 참석한 '플라자 합의'로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엔 환율을 250엔에서 120엔으로 극단적으로 하락시켜 나갔다. 플라자 합의는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경제 핵폭탄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초(超)엔고'로 인해 경기가 침체하기 시작하자 양적 완화를 통해 경기를 부양했다. 팽창된 통화는 부동산과 주식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거품(burble) 경제를 만들었다. '도쿄를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1988년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 중 무려 3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시가총액 1위 NTT의 시가총액은 2위 IBM의 3배가 넘었다. 일본의 GDP는 1987년부터 미국의 약 50%, 1993년부터 미국의 약 60%, 1995년 미국의 73%에 달했다. 그해 달러-엔 환율은 79엔까지 내려갔다. 1994년 일본의 GDP는 전 세계 GDP의 18%나 되었다. 2024년 현재 유럽연합(EU)이나 중국 GDP가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컸다.
1990년대 초 버블 경제 붕괴 당시 닫은 일본 도치기현 닛코에 있는 기누가와 온천 리조트. ⓒ 로이터=뉴스1 ⓒ News1 정지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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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자 합의 이후 급격한 통화 팽창과 비정상적 자산 가치 상승을 겪은 일본은 관료가 주도한 폐쇄적 정책, 아날로그 문화, 금융시장 부실화, 디플레이션, 인구 고령화와 감소, 1995년 고베 대지진과 2011년 동북 대지진, 내수 중심 경제구조에 따른 '갈라파고스'화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1990년대 초부터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초장기 불황을 겪었다.
생산 가능 인구 대(對) 노인 인구 비율은 1975년 8:1에서 2005년 3.3:1로 악화됐으며, 2055년에는 1.3:1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GDP는 1994년 5조 달러였는데, 30년 후인 2023년 4.2조 달러로 8000억 달러나 감소했다. 1989년 최고점을 찍었던 닛케이 지수는 2024년 2월이 돼서야 1989년 지수를 넘어섰다. 플라자 합의가 있었던 1985년 일본 GDP의 약 5분의 1 수준인 3130억 달러에 불과했던 중국의 GDP는 2023년 17.3조 달러로 일본 GDP의 4배 이상이 됐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 출간된 지 35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만개했던 벚꽃이 떨어진 땅 위에 소낙비가 내린 것'과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일본은 라이벌 중국의 부상,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와 노동력 감소, GDP의 약 3배에 달하는 국가부채, 불안정해진 사회보장제도, 디지털 경쟁력 약화, 신용등급 하락 등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다. 2000년대 이후의 잦은 정권교체가 가져온 연립내각 출범은 관료의 영향력을 한층 더 강화시켜 정책 추진력을 떨어뜨렸다. 일본 경제는 끓는 비커 속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어가는 생사의 위기를 겪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누구 하나 소리 높여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세습정치인으로 자민당 간사장과 방위청장을 지냈으며, 중의원 12선 의원인 이시바 시게루 총재가 지난 1일 102대 총리로 취임했다. 이시바는 성장전략의 핵심은 최저임금 인상이라고 말해왔다. 금융소득세와 법인세 인상 필요성도 주장했다. 이시바는 전임 기시다 내각이 제시했던 '2030년대 중반까지 전국 평균 시급 1500엔' 목표를 앞당겨 2020년대 내에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시바의 경제정책은 분배를 중시한 기시다의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시바의 경제정책은 시장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총리 취임 하루 전인 지난달 30일 닛케이 지수는 1700 포인트(4.8%)나 하락했다. 다행히 취임한 1일 증시는 1.93% 오른 채 폐장됐다.
지난달 30일 일본 도쿄 도심에서 닛케이지수가 표시된 전광판 앞에서 시민들이 대화하고 있다. 2024.09.30 ⓒ 로이터=뉴스1 ⓒ News1 김지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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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 주류는 멀리는 1868년 메이지 유신, 가까이는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해 자민당으로 출범한 '55년 체제'에 기원을 두고 있다. 대표적 세습 정치인은 아베 신조, 아소 다로, 하토야마 유키오,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 등이다. 하토야마를 제외한 대다수 세습정치인들은 보수적, 일본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다. 아베 전 총리의 아버지는 아베 신타로 외상, 외조부는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이뤄낸 기시 노부스케 총리, 작은 외조부는 오키나와 반환을 성사한 사토 에이사쿠 총리다. 이시바 총리도 할아버지가 시장, 아버지가 지사를 지냈다. 자민당 내 세습의원 비율은 약 30%에 달하며, 2017년 아베 내각은 각료 중 65%가 세습의원이었다. 일본을 '현대의 얼굴을 한 봉건국가'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이시바는 '비둘기파'로 분류되지만, 프라모델 제작까지 하는 '밀리터리 덕후'인 안보 전문가로 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미일동맹, 한미동맹 등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다자안보체제 구축을 주장한다. 이시바는 미국 전술 핵무기의 일본 배치를 통한 미·일 간 '핵 공유' 필요성도 주장한다. 모두 중국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시바는 2011년 자민당 영토특위 위원장 재임 시 '다케시마의 날' 제정을 추진했으며,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시바는 지난 4일엔 내각에 납북 일본인 문제 해결을 위한 도쿄-평양 연결 연락사무소 설치 검토를 지시했다.
비둘기파든 '매파'든 일본 정치인들은 일본의 시각에서, 일본의 국익을 위해 미국과의 동맹 강화, 한국과의 군사협력 증진 등을 주장한다. 역시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국립묘지 현충탑에는 '스스로 지키려 하지 않는 자 그 누가 도우려 하겠는가?'라는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의 말이 새겨져 있다. 우리 모두가 느끼듯이 지금은 전쟁이 이어지는 격변기다. '제비와 참새가 사는 초가집이 불타오르고, 기둥으로는 구렁이가 기어오르는 연작처당(燕雀處堂·무사안일에 빠져 위험이 닥쳐와도 깨닫지 못하는 것)' 상황이다. 누가 일본 총리가 되고 누가 중국 국가주석이 되든, 우리 스스로가 더 부유해지고, 더 강해지지 않고는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중국, 일본과의 경쟁은 물론 협력도 쉽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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