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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수)

[김상미의감성엽서] 오늘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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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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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새날이 밝아온다. 똑같은 일상이지만 새날이 밝아온다는 것은 언제나 경건하고 아름답다. 하루하루가 정말 대단하고 위대하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아침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는 산책길에 오른다. 요즘은 홍제천이 너무 번잡해 동네 골목 구석구석 돌기를 한다. 아침은 아침대로, 오후는 오후대로 골목 안 풍경은 늘 새롭고 집들은 평화롭다. 나는 마주치는 나무와 꽃, 사물들과 정다운 인사를 나눈다. 안녕! 안녕! 소리 내어 말하면 금세 기분에 활기가 돋는다. 가을이라 하늘 보기가 참 좋다. 권운과 고적운이 새털구름과 양떼구름을 만들어내고, 하늘은 자꾸만 높아지고, 푸르러지고….

산책하는 동안만은 오롯이 골목이 만들어내는 풍경에만 집중하자며 아주 작은 비행기처럼 귀여운 잠자리들과 드문드문 혹은 옹기종기 핀 반가운 코스모스꽃들과 누군가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평화롭다. 휴일 아침이 주는 평화. 그 평화에 기대어 김종삼 시인의 시, ‘평화롭게’를 입속으로 외워 본다. “하루를 살아도/ 온 세상이 평화롭게/ 이틀을 살더라도/ 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 그런 날들이/ 그날들이/ 영원토록 평화롭게--”

꿈같은 일이다. 평화는 자유로운 인간애에서 나오고, 기쁜 인간 존중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시대는 너무 아프고 슬프다.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이 훼손되고 무가치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고매한 영혼에도 높은 정신적 안내에도 깨우침당하거나 깨우쳐지기를 원치 않는다. 내 것, 네 것이 분명하고 중요한 만큼 그 사이로 보이지 않는 선(善)과 친절도 함께 소멸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도나도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 그 쓸쓸함을 잠시 잊으려 오늘도 나는 산책길에 오르고, 그 끝에서 다시 한 번 깊은 아픔과도 같은 이 시대를 마치 친한 동료처럼 감싸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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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을 가로지르며 비행기 한 대가 날아간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가득 찬 비행기. 골목 끝에서 그 비행기를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비행기가 지구에 끼치는 환경오염 같은 건 이 순간만은 생각하지 말자며 길게 이어지는 비행운에서 눈을 뗀다. 평화롭다. 생존보다는 파멸이 더 많은 진실 스펙트럼 안에서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모든 게 우르르 무너질 테지만, 이 순간만은 평화롭다.

모든 문제의 기본은 우리 인간들에 의해 생긴 문제들. 그 문제에서조차 자유로워지고 싶어 오늘도 나는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 집으로 향한다. 가을 하늘은 높고 청명하고, 구름들은 제각각 숨은그림찾기 놀이에 취해 있다. 가까운 곳에서 교회 종소리가 들려온다. 삼삼오오 성경책을 든 사람들이 지나간다. 여전히 삶은 계속되고, 나 역시 그 행렬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애도의 마음으로 우두커니 하늘을 또 한 번 우러른다. 오늘도 여전히 평화롭게 보이는 골목 끝 어디쯤에서.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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