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3 (월)

[글로벌 아이] 일본 정부가 하지 못하는, 아니 하지 않는 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앙일보

정원석 도쿄 특파원


“물이 쏟아진다! 천장이 뚫렸다!”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 30분경,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宇部)의 해저 탄광에서 석탄을 캐고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했다. 도코나미(床波) 해안 입구부터 1㎞ 먼바다에 떨어져 있던 지점의 갱도 천장이 뚫렸다. 바닷물이 빠른 속도로 유입됐고 인부들은 입구를 향해 질주했다. 넘어지면 그대로 밟혀 일어나지 못했다.

물은 갱도 입구까지 삽시간에 차올랐다. 이날 따라 채굴량을 늘리라는 재촉을 받던 오전조 183명이 나오지 못했다. 사고 소식에 자다 뛰쳐나온 야간조는 입구를 목전에 두고 물에 휩쓸리는 동료를 목격했다. 가족들은 물이 넘실대는 갱도를 바라보며 “아이고, 아이고” 울부짖었다. 곡소리는 며칠 동안이나 계속됐다.

중앙일보

이번에 발견한 장생 탄광의 갱도 입구. 정원석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는 이름이 무색한 장생(長生·죠세) 탄광 참사 이야기이다. 이 해저 탄광은 ‘조선 탄광’으로 불렸다.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광부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희생자 중 136명은 조선인이었다.

우베시 전체 석탄 생산량의 90%는 장생 탄광 같은 해저 탄광에서 나왔다. 고된 노동인 만큼 대우가 좋아 일본인도 선호했지만, 장생 탄광은 예외였다. 위험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김원달씨는 생전에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바다 밑 갱도에선 어선의 ‘통통’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썼다. “철조망과 무장 경비들이 있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탈출해 어머니에게 돌아가겠다”던 그는 결국 인재(人災)에 희생됐다. 당시 법으로 장생 탄광은 채굴을 하면 안 됐다. 지층 두께가 40m가 넘어야 했지만, 30m에 불과했다. 탄광 사장은 이후 재판에서 “법을 위반했다”고 털어놓았다.

사고는 무관심과 은폐 속에 잊혔다가 반세기가 지나 한 일본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2013년엔 시민 모금으로 마련한 1600만 엔으로 추모 공간도 만들었다. 희생자 183명의 이름을 새기고, 강제노동과 참사에 대해 사과를 담은 추도문도 붙였다. 이들은 수소문해 찾은 유족들과 일본 정부에 유골 발굴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유골 위치를 알 수 없다”며 발굴 작업에 난색을 보였다.

이들은 직접 크라우드펀딩에 나섰다. 한일 양국에서 천엔, 만엔이 모여 800만 엔이 됐다. 증언을 바탕으로 굴착기를 동원해 갱도를 찾다 지난 9월 25일, 입구를 발견했다. ‘장생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의 지난 30년 활동의 결과이다. 이노우에 요코(井上洋子) 대표는 “정부가 유골 위치를 모른다며 도망칠 핑계로 삼는다면, 직접 유골이 있다고 확인시켜주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원석 도쿄 특파원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